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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준

조용한 주말, 복면가왕, 그리고 하이든 금요일 오후,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건너, 집에 닿기 직전 반드시 올라야 하는 '깔딱 고개', 500 미터 남짓한 마운틴 고속도로 구간을 넘고 나면, '아, 드디어 주말이구나!' 하는 느낌이, 마치 전류가 통하듯 짜릿하게 온몸으로 전해 온다. 금요일의 저녁 식사는 더더욱 달콤하고, 거의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밀려오는 심신의 편안함은 이루 형언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토요일도 더없이 안락하다. 아무런 약속도 없고, 미리 짜놓은 계획도 없다. 다들 마음껏 늦잠을 자도 된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을 푹 놓고 자면, 누가 깨우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눈을 뜬다. 그것도 평소보다 일찍. 새벽 다섯 시! 평일이라면 '아, 아직도 한 시간 반을 더 잘 수 있구나' 안도하면 다시 눈을 붙이고, 어떻게든 더 깊이 잠들어 보.. 더보기
생애 첫 가족 라이딩 한국을 다녀온다고 3주를 빼먹는 바람에 동준이한테 배정된 BC 주정부의 오티즘 펀드가 좀 남았다며, 매주말 수영만 하기보다는 자전거를 한 번 태워보면 어떻겠느냐고 아내가 내게 의향을 물었다. 펀드는 주로 동준이를 옆에서 지켜보고 도와주는 보조교사의 급료로 쓰였다. 동준이가 다니는 학교의 보조교사를 학교 밖에서도 커뮤니티 센터의 수영장에 가거나 운동을 시키는 데 딸려 보냈다. 보조교사는 '노벨'이라는 이름의 스리랑카 출신 남성인데, 키는 나보다 작지만 라디오 아나운서 뺨치는 목소리에, 차분하고 침착한 성정이 느껴지는 사람이다. 동준이도 잘 따른다. 장거리 달리기를 이미 토요일에 마친 터여서, 일요일이 비었다. 근처 '시모어 보전구역' (Lower Seymour Conservation Reserve, "LS.. 더보기
아내가 돌아왔다 아내가 돌아왔다. 얼굴이 별로 좋지 않다. 피로와 슬픔이 뒤범벅 된 얼굴이 어찌 좋을 수 있으랴… 아내의 공항 도착 시간이 12시30분인데 성준이를 학교에서 데려와야 하는 시간이 2시40분, 동준이의 스쿨버스가 집에 들르는 시간이 그 직후다. 아내를 공항으로 데리러 나가기가 어정쩡했다. 공항까지 가는, 혹은 공항에서 집까지 오는, 시간은 대략 한 시간 안팎을 잡는데, 아내가 비행기에서 내려 세관을 통과해서 공항 밖까지 나오는 시간은 종잡기가 어렵다. 여기에 부친 짐을 찾아야 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따라서 큰 짐만 없다면 공항에서 전철 타고 워터프런트 역까지 와서 시버스로 노쓰밴으로 오는 게 더 낫겠다는 계산이었다. 2시30분에 시버스가 론스데일 부두에 닿았고, 곧 아내가 나왔다. 엇, 그런데 제법 큰 이.. 더보기
로티세리 치킨 나는 살림에 서툴다. 그 살림 중 '요리'라는 대목에 초점을 맞춘다면 서툴다는 표현조차 아까울 정도로 초라하다. 결혼하기 전까지 10년 넘게 싱글로 객지 생활을 했지만 스스로 요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조차 없다. 그 게으름, 그 호기심 결핍의 대가를, 아내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톡톡히 치른다. 월요일 새벽녘, 문득 잠이 깼다. 성준이 점심을 뭘로 싸지? 가장 먼저 떠오른 물음이었다. 동준이는 보조 교사가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사주기로 했으니 그렇다치고, 성준이는 뭘 싸줘야 하나? 따지고 보면 별일도 아닌데 그게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다음 저녁은, 내일 아침은, 점심은, 저녁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젠장... 아내가 꼼꼼히 메모해 둔 내용을 본다. 아내가 부재한 나흘 동안.. 더보기
준준이의 근황 날씨에 견준다면 동준이는 흐리거나 비, 성준이는 대체로 맑음이다. 아니, 요즘처럼 가뭄이 자심해서 비가 고대되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서로 바꿔야 좋을까? 동준이는 엊그제 또 발작을 일으켰다. ‘또’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채 한 달도 안 돼서 다시 발작을 일으킨 탓이다. 이전 발작은 6월28일, 내가 하프마라톤을 뛰던 날, 아내가 몰던 차 안에서 일어났다. 아침 저녁으로 하루 두 번씩 복용하는 약의 강도를 다시 높여 보라는 게 의사의 조언인데, 나나 아내나 불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다. 말귀도 못 알아듣고, 혹은 무시하고, 걸핏하면 쿵쿵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대고, 시도때도 없이 ‘Washing machine~!’을 외치며 세탁기 사용을 엄마에게 강요해서 부아를 돋우는 녀석이지만, 이렇게 발작을 일으킨 .. 더보기
자전거 연습 아침을 먹고 집 뒤 시모어 보전지역 (Lower Seymour Conservation Reserve)으로 갔다. 아이들에게 자전거 타기를 연습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내에게도 자전거를 타지 않겠느냐고 떠봤지만 차에 자전거를 석 대까지 넣기는 무리라는 핑계를 댔다. 억지로 구겨넣으면 석 대까지도 영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아무리 미니밴이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임은 분명했다. 자전거 운반용 힛치 (hitch)가 필요했다. 그래서 동준이와 성준이의 자전거만 실었다 (가능하면 이번 주 중에 힛치를 달 계획이다). 자전거 타기를 연습시키는 방식은 위 사진처럼 좀 무모했다. 나는 동준이를 맡고 아내는 성준이를 맡아, 옆에서 뛰면서 도와주는 방식. 성준이는 자전거도 작고 기어도 저단으로 천천히 진행했기 때문에 아내도 그.. 더보기
자전거 쇼핑 오랫동안 뒤뜰 창고에 버려두었던 녹슨 옛 자전거 넉 대를 처분하고, 동준이의 새 자전거를 사러 노쓰밴과 밴쿠버의 여러 가게를 전전했다. 저 사진에 나온 것들 중 적어도 두 대는, 자전거에 대해 지금 아는 것을 그 때도 알았더라면 저런 자전거는 사지 않았을텐데 싶은 것들이다. 사실은 싼맛에 산 그 값만큼도 타지 못한 채 녹만 잔뜩 먹이고 말았지만... 요즘 자전거들이 대부분 몇십 단의 복합 기어를 장착하고 있어서 그걸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전제가 따르기 때문에 동준에게 맞는 자전거를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혀 기어가 없는 자전거를 사면 평지 말고는 탈 수가 없는데, 노쓰밴에 언덕이 좀 많은가. 게다가 큰 몸집으로 이것저것 부숴뜨리기 일쑤여서 가능하면 튼튼한 산악 자전거형 타이어와 프레임을 원했.. 더보기
어둠 속의 아이 동준이가 또 발작을 일으켰다.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 3시쯤이었다. 갑자기 아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후닥닥 동준이 방으로 뛰어간다. 왜, 왜? 동준이? 두 팔을 좀비처럼 앞으로 뻗은 채 꺼억 꺼억... 동준이는 발작하고 있었다. 눈은 초점을 잃었고, 입에서는 피와 침이 흘러, 베갯잇을 적시고 있었다. 온몸이 요동하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동준아, 동준아, 가망없이 이름을 부르면서, 팔을 잡고, 어디 숨구멍이 막히지 않을까 확인해 주는 일말고는 달리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속절없이, 무기력하게, 발작이 끝나기를 지켜보는 수밖에, 그 수밖에는 없었다. 다시, 머릿속은 텅 비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어떤 감정이 솟았는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판단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다시 잠자리.. 더보기
동준이는 이제 열여섯 살! 지난 일요일(12월7일)은 동준이 생일이었다. 그러나 동준이는 그런 사실을 모른다 (아니 알까?). 오늘이 네 생일이야, 라고 말하니까, 동준인 대뜸 께이끄! 한다. 케이크를 먹자는 얘기다. 동생인 성준이는 제 생일과 크리스마스에만 마음이 가 있지 형 생일은 물론 엄마나 아빠의 생일에 대해서도 무감하다. 이달 말이 엄마 생일인데, 혹시 무슨 선물을 드릴지 생각해 봤니, 라고 물으니, "Oh, I forgot"이라고, 자신의 단골 변명을 내세운다. 캐나다살이의 호젓함을 절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중 하나가 동준이나 성준이 생일 때다. 물론 아내나 나의 생일이라고 해서 그런 쓸쓸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아무렇지 않은듯, 혹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는 게 습관처럼 돼 버렸다. 그리고 내가 .. 더보기
시애틀 마라톤을 포기하다 이번 일요일로 예정된 시애틀 마라톤을 뛰지 않기로 했다.아예 시애틀 여행 자체를 취소하기로 했다. 서둘러 토요일과 일요일 호텔 예약을 취소했다. 일요일 분은 따로 벌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데, 토요일 분은 모르겠다. 금요일(오늘) 오후 6시 전에 취소해야 벌금이 없는데, 그보다 40분쯤 지난 시각에 취소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시애틀 마라톤에 등록해 놓고, 뛰는 날이 가까워 올수록 불안했고 부담스러웠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제외한다면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분주한 시기일 추수감사절이 낀 주말에 마라톤이 열린다는 사실을, 등록할 당시에는 미처 몰랐다. 알았을 수도 있지만 그게 내 주의를 크게 끌지 않았다. 그런데 날이 부득부득 다가올수록 엄청난 교통 체증과, 국경을 통과할 때 감내해야 할 지루하고 긴 기다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