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 얘기

로티세리 치킨

나는 살림에 서툴다. 그 살림 중 '요리'라는 대목에 초점을 맞춘다면 서툴다는 표현조차 아까울 정도로 초라하다. 결혼하기 전까지 10년 넘게 싱글로 객지 생활을 했지만 스스로 요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조차 없다. 그 게으름, 그 호기심 결핍의 대가를, 아내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톡톡히 치른다.


월요일 새벽녘, 문득 잠이 깼다. 성준이 점심을 뭘로 싸지? 가장 먼저 떠오른 물음이었다. 동준이는 보조 교사가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사주기로 했으니 그렇다치고, 성준이는 뭘 싸줘야 하나? 따지고 보면 별일도 아닌데 그게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다음 저녁은, 내일 아침은, 점심은, 저녁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젠장...


아내가 꼼꼼히 메모해 둔 내용을 본다. 아내가 부재한 나흘 동안, 성준이에게 싸줄 만한 점심 목록이 적혀 있다. 그래 월요일엔 핫도그다. 그런데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샌드위치 사이에 구운 소세지만 넣지 않고 가외로 치즈와 햄을 각각 넣었다. 물론 케첩도 잊지 않았고... 그렇게 만들어 도시락을 싼 다음에 다시 읽어보니 치즈나 햄 얘기는 나오지도 않는다. 이걸 다시 걷어내나? 


성준이에게 미리 경고를 한다. 핫도그가 좀 웃길 거다. 치즈랑 햄을 하나씩 넣었다. 성준이의 반응. "Dad, you are a crazy cook, aren't you?" 하며 낄낄 웃는다. "Anyway, you must eat at least one of them, O.K.?" "...O.K."


아이들 학교에 보내고 근처 식료품점에 들렀다. 뭔가 저녁거리로 먹을 게 없을까 찾아보려는 심사. 아래 사진과 아주 흡사한 로티세리 치킨 한 마리를 8.9달러 (약 9천원)에 샀다. 그리고 근처 베이커리에서 블루베리 머핀과 초콜렛 칩 쿠키도 아이들 간식용으로... (베이커리를 찾을 때마다, 캐나다에도 한국의 파리 바게트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자주 열망한다. 아내도 같은 생각.)



성준이를 학교에서 픽업하는데 대뜸 어떻게 그런 핫도그를 만들었느냐며 나를 마구 공격한다. 장난끼 섞인 공격이지만 핫도그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 좋지 않은 의미로 - 메시지는 확실하게 들어왔다. 미안하다.... -_-;;


집으로 돌아오면서 로티세리 치킨을 샀노라고 했더니 그게 뭐냐고 묻는다. 머리 없는 닭 한 마리라고 대답해 주니 그게 무척이나 엽기적이면서 신선했던 모양이다. "A chicken without a head? Cool~! Can I see it?" 집에 가서 보여주마고 했다. 



저녁은 그렇게 해결됐다. 두 녀석 모두 치킨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지라, 나까지 포함해 사내 셋이서 닭 한 마리를, 케첩 소스와 소금, 그 유명한 스리라차 (Sriracha) 소스를 더해 금세 뚝딱 해치워 버렸다. 'Best chicken ever!'라고 호들갑을 떨며 먹던 성준이는, 혹시 먹어치우기 전에 사진을 찍어뒀느냐고 묻는다. 아니, 왜? 사진을 찍어놓아야 엄마가 돌아오면 보여주고 또 사달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는 반문이었다. 로티세리 치킨 사진은 널려 있으니 염려 말라고 안심을 시켰다. 하하.


그렇게 정말 '그까이꺼 대충' 저녁을 넘기고, 평소처럼 성준이는 아이패드 미니를 보기 위해 수학/읽기 문제집을 풀기 시작했고, 동준이는 방에서 잠시 쉬다 화장실로 갔다. 볼일 보고, 샤워 하고, 발작 완화용 약을 먹으면 동준이의 하루는 마무리가 된다. 성준이도 막 수학/읽기 문제집을 매일 저녁 네 페이지씩 푸는 '의무 방어전'을 치른 뒤, 제 방으로 아이패드 미니를 들고 들어갔다 (주말엔 쉬게 해달라고 해서 면제다). 레고 게임 아니면 넷플릭스의 '스케어디 스쿼럴'을 보고 있을 테다. 


집안이 적막강산이다. 아내가 본래 말수도 적고 조용한 편이어서, 설령 있다고 해도 집안은 여전히 조용하지만, 그 조용한 느낌, 적막한 분위기가, 아내가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텅 빈 느낌. 아내의 빈자리가 점점 더 크게 느껴지는 저녁이다 (이렇게 글을 끄적이느라 국을 데운다고 오븐을 켜둔 걸 까맣게 잊었다. 연기 감지기가 귀청이 찢어지게 울어대기 시작할 즈음에야 아차 싶었지만 한 끼분 국은 사라져 버렸다).


아래는 성준이가 학교 숙제로 그린, '나의 여름'. 여름에 내가 겪은 일의 요약본인 셈인데, 맨 아래 오른쪽 그림이 뭔지 궁금했다.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란다. 아 그래, 뢉 (Rob)! 우리집 양쪽 이웃 중 서로 통성명을 제대로 튼 쪽은 나이 많은 로이드 (Lloyd) 할아버지뿐이었고, 다른 쪽은 성준이가 하이 뢉! 하는 소리에 '아 저 이웃의 이름이 로버트구나'라고 생각한 정도다. 아내와 성준이는 이미 인사를 나눈 상태지만 나는 지난 일요일 아침까지도 정식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그렇게 친교가 더뎠던 데는 그 집 쪽으로 높다란 나무 울타리가 쳐진 것도 무관하지 않지만, 무엇보다 서로 일상에 바쁘고 생활 패턴이 다르다 보니 서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던 탓이다. 확실히, 열려 있는 것은 아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