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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조용한 주말, 복면가왕, 그리고 하이든


금요일 오후,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건너, 집에 닿기 직전 반드시 올라야 하는 '깔딱 고개', 500 미터 남짓한 마운틴 고속도로 구간을 넘고 나면, '아, 드디어 주말이구나!' 하는 느낌이, 마치 전류가 통하듯 짜릿하게 온몸으로 전해 온다. 금요일의 저녁 식사는 더더욱 달콤하고, 거의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밀려오는 심신의 편안함은 이루 형언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토요일도 더없이 안락하다. 아무런 약속도 없고, 미리 짜놓은 계획도 없다. 다들 마음껏 늦잠을 자도 된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을 푹 놓고 자면, 누가 깨우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눈을 뜬다. 그것도 평소보다 일찍. 새벽 다섯 시! 평일이라면 '아, 아직도 한 시간 반을 더 잘 수 있구나' 안도하면 다시 눈을 붙이고, 어떻게든 더 깊이 잠들어 보려 스스로 독려하는데, 토요일 아침에는 다시 눈을 감아도 쉽게 잠들지 못한다. 피로해서가 아니라 편해서.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스르르 다시 잠 속으로 들어갔고, 여덟 시가 넘을 때까지 푹 잤다. 온가족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즐겁게 늦잠을 잤다. 


주말이면 어디 주변으로 산보라도 나가고, 소풍이라도 가고 싶어 해야 마땅할텐데 누구도 그러자고 제안하질 않는다. 내켜 하지 않는다. 나는 평소에 늘 한두 시간씩 뛰러 나가니 토요일 하루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방에 콕 박혀 있어도 좋으리, 싶은 것이고, 아내 또한 주일 내내 아이들 학교에 보내고, 데리고 오고, 장 보러 다니고 하느라 심신이 피곤한 마당이라, 아무런 약속도 없이 그저 거실에 편안히 앉아 좋아하는 책을 읽는 게 훨씬 더 좋은 것이다. 



성준이는 토요일 저녁, 난데없이 '패럴 윌리엄스'의 '해피'에 맞춰 춤 솜씨도 보여주시고...


주말에 가장 바쁜 건 동준이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각각 두 시간 남짓 근처 커뮤니티 센터에서 수영 - 보다는 '물놀이'에 더 가깝지만 - 을 한다. 동준이를 건사해 주는 보조 교사가 있어서 나나 아내에게는 크나큰 도움이 된다. 이제 '거한'이 돼 버린 동준이를 건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주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동준이가 흥분을 하거나 폭주를 하면 엄마나 아빠 혼자 감당하기는 속수무책이다. 동준이를 돌봐주는 보조 교사는 그래서 더없이 다행스럽고 고마운 존재이다.


일요일은 토요일보다 조금 더 바쁘다. 시간도 더 빠르게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다. 나는 평일처럼 6시30분에 알람을 맞춰놓는데, 이번엔 그보다 한 시간 반쯤 더 이른 새벽 다섯 시쯤 잠이 깼다. 거의 승패가 결정난 것처럼 보이는 로저 페더러 - 다비드 고팡의 호주 오픈 경기 3세트 후반을 운좋게 관전하고 나니 다섯 시 반이다. 전날 밤에 미리 챙겨놓은 달리기 셔츠와 타이즈를 차려 입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바다 건너 밴쿠버의 엠파이어 필드 트랙을 돌 심산이었으나 다리를 건너는 동안 마음이 바뀌었다. 그냥 내처 뛰어서 라이온스 게이트 다리를 건너 다시 돌아오는 장거리 코스로 계획을 변경했다. 지난 일요일과 비슷한 코스지만 방향이 반대다. 지난 주에는 웨스트 밴쿠버 쪽으로 내려가서 라이온스 게이트 다리부터 건넜었다. 



새벽의 도시는 더없이 조용하다. 빼곡한 주택들, 오피스 빌딩들이, 불을 켜놓은 곳도 있지만 대개는 껌껌하다. 그래서 사람뿐 아니라 건물들조차 잠을 자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따금씩 차들이 도로를 질주하는데, 그 소리가 더없이 크고 위압적이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는 느낌이 든다. 바다를, 다리로 건널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신기해 하며 세컨드 내로우즈 다리를 건너고, 다시 라이온스 게이트 다리를 건넜다. 그 아래로 거대한 화물선들이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여느 다리들보다 워낙 높게 아치형으로 지은 형태여서, 두 다리 모두 퍽이나 높은 전망대 구실도 한다. 다리의 가장 높은 지점에서 내려다보는 버라드 만과 밴쿠버, 북해안의 풍경은, 언제 어느 때든 장려하다. 아름답다.


집에 돌아오니 여덟시 반이다. 세 시간을 뛰었지만 여전히 아침이고, 일요일 하루가 아직 넉넉하게 남았다는 안도감으로 돌아온다. 달리기는, 특히 적어도 두 시간 이상 지속해야 하는 장거리 달리기는, 뒤로 미룰수록 뛰기 어렵다. 일요일이라고 해서 아침 먹고 두어 시간 있다가 10시쯤 뛰자거나, 점심 먹고 나서 오후에 뛰자고 하면, 계획하기는 쉽지만 실행하기는 더없이 어렵다. 그러니 아침에 눈 떴을 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집밖을 나서는 게 최선이다. 



SJ practicing Haydn


성준이의 스케이팅 레슨을 마치면 점심이다. 동준이의, 대체로 한 시간에서 두 시간쯤 걸리는, 느리디 느린 점심 식사가 끝나면 오후 두 시나 세 시. 그러면 다시 보조 교사와 연락을 해 동준이를 물놀이에 보낸다. 오후로 가면서 일요일도 이울고, 이제 월요일을 예비해야 한다. 딱히 괴롭거나 슬프거나 짜증스럽지는 않지만, 또 직장의 일이 싫은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 그래도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된다는 사실이 주는 부담은 어쩔 수 없다. 


성준이가 반은 자발적으로, 반은 엄마에게 등 떠밀려, 피아노를 뚱땅거린다. 지난 몇 주간 연습해 온 하이든의 놀람 교향곡 중 2악장 한 대목이다. 성준이 덕택에 하이든을 좀더 자주 듣게 된 것도 소득이라면 소득. 조용히, 마치 아기를 잠재우듯 부드럽게 흐르던 선율 위로 꽝! 하는 소리가 들릴 때면, 정말 하이든의 장난꾸러기 기질이 여간 아니었겠다, 라고 새삼 느끼며 슬몃 웃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