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아일랜드 주변에는 이처럼 자잘한 섬들이 참 많다. 그 섬들에 자리잡은 아담한 집, 목장, 농장, 작은 개인 선착장, 소규모 골프장처럼 보이는 목초지 따위를 보노라면, 자연스레 '저 섬에 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침 섬들 사이로 BC 페리가 지나간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혹은 사라져 버리는 듯한 느낌을 문득 가질 때가 있다. 그저 발 한 번 잘못 디디면, 심지어 고개 한 번 잘못 돌려도, 혹은 몇 초 간의 몽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만으로 삶이 죽음으로 표변할 수 있다는 섬뜩한 깨달음과 만날 때가 있다. 지난해 7월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다 트럭에 부딪혀 인도로 날아가던 순간이 그랬다. 그리고 지난 수요일, 빅토리아 당일 출장을 마치고 수상비행기로 돌아오던 길에 또 그런 느낌을 가졌다.
지난 해의 자전거 사고와 다른 점은, 이번에는 삶과 죽음에 중뿔난 턱이나 벽이 있는 게 아님을, 때로는 화선지에 물이 스며들듯 부지불식 간에 만날 수도 있고, 때로는 벼락 맞듯 폭발적으로 조우할 수도 있음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절감하고 또 절감했다는 점이다.
늦은 아침, 빅토리아로 향하는 중. 멀리 구름 사이로 햇살이 보인다. 지난 한 달여 동안 햇빛 구경하기 어려웠다. 늘 비, 비, 비였다.
오전에도 바람이 제법 불었다. 기세가 이보다 조금 더 커지면 비행기가 못 뜰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에 항공사의 웹사이트를 확인했지만 예정대로 날고 뜨고 있었다. 물 위로 뜨고 앉는 수상 비행기는 바람이 너무 세게 불거나 안개가 짙게 끼거나 날이 어두워지면 운항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작년 여름엔가 한 번, 짙은 안개 때문에 예정된 출장을 미룬 적이 있었다.
오후 4시 무렵, 빅토리아에서 업무를 마치고 밴쿠버로 돌아가기 위해 수상 비행기 탑승장인 빅토리아의 내항으로 다시 왔다. 오후가 되면서 바람의 기세가 더욱 사나워져서, 과연 비행기가 뜰 수나 있을까 적이 걱정스러웠다. 예정대로 비행기는 떴다. 막 비행기보다 30분 먼저 출발하는 밴쿠버행 비행기에 좌석 여유가 있어서 그걸 탔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조바심이었다.
빅토리아 내항에서 비행기가 이륙하려 난바다 쪽으로 나가는 중이다. 저 알록달록한 풍선 깃발을 통해, 바람이 꽤 세차게 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비행기는 이륙하자마자 바람을 온몸으로 받았다. 고작 열댓 명밖에 태울 수 없는 소형 비행기인지라 바람의 강도를 고스란히 반영했다. 물 위로 동체를 띄우자마자 왼쪽으로 선회하면서 밴쿠버 쪽으로 방향을 잡는데 여느 때보다 유독 더 사나워진 바람을 거스르며 틀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비행기는 왼쪽으로 더 기울었다. 느낌으로는 2, 30도쯤 기운 것 같다. 그 와중에서 바람이 쉼없이 동체를 떠밀었고, 동체는 출렁이며 아래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출렁대며 충격을 받아냈다. 그 출렁이는 순간마다 몸과 혼이 순간적으로 분리되는 듯한 느낌이, 아주 짧은 전기충격을 받은 듯 찌릿찌릿한 느낌과,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포감이,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고 밀려갔다.
비행기는 덜컹대며, 비틀대며 바람을 거슬러 날았다. 동체는 덜덜덜 떨렸고, 유독 강한 마파람을 받을 때마다 기체는 발작하듯 좌우로 혹은 위아래로 요동쳤다. 속이 메슥거렸다. 몸에서 식은 땀이 났다. 무슨 큰 도움이 될 수도 없을테지만 안전벨트를 다시 확인하고... 다른 승객들 역시 짐짓 태연한 듯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지만, 애쓰는 그 노력이 얼굴과 몸짓에서 여실이 드러나서, 그들의 두려움이 더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장담컨대, 누구나 할 것 없이 ‘아이고, 이러다 추락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끌어냈다 밀어냈다 수없이 반복했을 터이다. 아마도 경험 많은 조종사 한 사람만 빼고…
이건 빅토리아로 향하는 아침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그림이다. 군항이다. 군함 세 척이 정박 중이다.
수상비행기는 여느 여객기보다 한참 낮은 고도로 난다. 최고 비행고도는 3,000 미터지만 실제는 그보다 훨씬 낮은 높이로 난다. 육안으로는 1,000~1,5000 미터쯤인 것 같다. 그만큼 아래로 보이는 풍경이 선명하고 가깝다. 비행기가 출렁일 때마다 유독 더 큰 공포를 느끼는 것도 아마 그처럼 낮은 비행 고도 탓일 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때 무력감이 찾아오는데, 그런 무력감 중에서도 가장 절실하고 허망한 무력감은 비행기를 탔을 때처럼 몸이 허공에 떠 있을 때가 아닐까? 내 몸의 어느 한 부분, 어디 단단한 곳에 의지하고 버틸 여지가 없음을 확인할 때처럼 곤혹스럽고 무력할 때도 달리 없는 것 같다. 지진이 두려운 것도, 내가 늘 발 딛고 살아 온 그 지지대가 한 순간에 꺼져버리기 때문은 아닐까? 설령 땅이 꺼져 죽는 경우보다 주변 건물이나 시설물이 무너지는 바람에 변을 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하더라도 심리적인 두려움은 '땅이 꺼진다'는 그 대목에 더 집중되지 않을까?
출렁대고 비틀대고 요동치는 소형 수상비행기 안에 앉아 손에 땀을 쥐면서, 참 심난해 했다. 불과 30분 남짓밖에 안 되는 비행인데도 체감되는 시간은 한없이 길었고 어두웠다. 내 평범한 삶이 갑자기 소중했고, 가족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산다는 것. 살고 싶다는 것.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 (UBC) 캠퍼스 곁을 나는 중이다. 여기를 지나면 키칠라노 비치, 스탠리 공원을 거쳐 밴쿠버 항구의 버라드 만에 닿는다.
비행기가 마침내 UBC 캠퍼스를 옆으로 바라보며 날아 스탠리 공원 위를 넘어설 때, 하여 밴쿠버 항구와 시립한 고층 빌딩숲이 보일 때, 나는 저리게 행복했다. 살았다!
이 풍경을 보는 순간 안도감이, 그야말로 밀물처럼 온몸으로 밀려왔다. 아, 살았다! 차들로 미어진 쪽 도로는 스탠리 공원을 거쳐 라이온스 게이트 다리를 건너 노쓰밴, 웨스트밴으로 향하는 경로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비조차, 그리고 우산을 날려버릴 것처럼 불어대는 바람조차, 땅에서 받고 땅에서 맞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사소하기 짝이 없는 당일치기 출장을 다녀오면서, 죽느냐 사느냐를 새삼 떠올리며 식은 땀을 흘리게 될 줄이야!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막 도착한 하버에어 수상비행기 너머로 수상 주유소와 스탠리 공원의 실루엣이 보인다. 출장길이 매번 이렇게 곤혹스럽다면, 정말 'No thank you'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