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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사이클링

습관의 힘

여러 달 전, 집 근처 키스 로드(Keith Road)를 뛸 때 찍은 사진. 이 때도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밴쿠버에 오래 살면 오리발이 될 거야."


밴쿠버 직장에 출근한 첫날, 한 동료가 던진 농담이다. 밴쿠버가 그만큼 비가 잦고 축축한 동네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올 겨울은 건조한 편이다. 밴쿠버 인근의 스키장 세 곳- 마운트 시무어, 그라우스, 사이프러스 -은 눈이 없어 난리다. 코스의 절반도 채 열지 못한 상태란다. 심지어 눈 많기로 유명한 휘슬러조차 누적 적설량이 채 1m가 안된다고 했다. 보통 이맘때면 족히 4~5m는 되는 산간 지역이 그러니 울상을 지을 만도 하다.


1월이 열리면서 정상 기후를 보여주려는 걸까? 이번 주 내내 비가 내렸다. 다음 주까지 이어지리라는 예보다. 물론 가봐야 알지만... (이곳의 기후는 워낙 변화 무쌍해서, 사나흘 뒤의 예보는 별로 믿을 게 못된다). 


밴쿠버의 비는 대체로 약한 비 (light rain)다. 는개, 보슬비, 부슬비, 가랑비 등이 주조를 이룬다. 한국의 소나기와 같은 비는 드문 편이다. 그래도 먹구름으로 덮힌 어둑신한 하늘, 그 하늘에서 하강하는 비를 맞으며 달리기는 쉽지 않다. 아니, 달리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다. 달리러 나가는 일이 어렵다. 그냥 하루 건너뛰자, 라는 욕망이 드세기 때문이다. 


어제가 특히 더했다. 보슬비도 가랑비도 아닌, 제법 굵은 빗방울이 꾸준한 기세로 내리고 있었고,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로 포장된 산책로 곳곳에는 물이 고였다. 나가, 말아? 그럴 때는 그저 '아무 생각없이' 나가는 게 상책이다. 일단 나가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게 예상했던 것보다,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쉽고 더 참을 만하다. 아니, 때로는 즐길 만한 수준까지 간다.


비 맞은 안경. 닦기도 그렇고, 벗어서 주머니에 넣기도 그렇다. 그래서 그냥 이대로 간다. 그래도 시야에 큰 장애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Bad weather always looks worse through a window” - Tom Lehrer 과연 옳은 말이다.


정초라 그런가 뛰는 사람이 유독 많았는데, 어제는 20여 명밖에 안됐다. 그만큼 날씨가 좋지 않았다는 뜻일테다. 산보하러 나온 사람은 더욱 드물었다. 하긴 이렇게 비와 바람이 듀엣으로 활동하는 날은 우산을 들고 나와봤자 흠뻑 젖고 말테니 아예 푹 젖을 각오를 하고 뛰러 나오는 경우가 아니라면 실내에 머무르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마라톤 계의 전설이자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에밀 자토펙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If one can stick to the training throughout the many long years, then willpower is no longer a problem. It’s raining? That doesn’t matter. I am tired? That’s besides the point. It’s simply that I just have to. - Emil Zatopek, Olympic runner 


의지력이 불필요한 경지라.... 과연 그런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지금은 다만 그런 경지에 다다르는 꿈만 꿀 뿐이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마치 당연한 일상처럼, 당연한 습관처럼, 그렇게 달리러 나갈 수 있는 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