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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과잉 표현의 시대

과공비례(過恭非禮), 라는 말을 좋아한다. 지나친 공손(恭遜)은 오히려 예의(禮儀)에 벗어난다는 뜻인데, 그 말을 요즘처럼 자주 떠올린 적도 드문 것 같다. 그만큼 지나친 공손,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위장된 거짓 예의, 공치사가 많아졌다는 뜻이고, 그만큼 서로에 대한 예의와 존중의 마음은 도리어 더 줄었다는 뜻으로 나는 해석한다. 


'너무'라는 말이 너무 남용되고, 뜻하지 않게 방구들이나 물이 존대어의 대상이 되고 - 이 방이 따뜻하십니다, 이 물이 시원하십니다 - 좀 예쁘장하다 싶은 연예인은 예외 없이 여신 몸매가 되고, 그저 그런 유행가 몇 곡 히트시켰던 가수는 전설이 되고 '국민 가수'가 된다. 좀 인기를 얻는다 싶으면 국민 여배우에 국민 할배, 심지어 국민 이모다. 너도 나도 국민 MC에 국민 오빠, 국민 첫사랑이다. 이건 도무지...


아마도 옷감을 아끼겠다는 의도였을텐데 (정말?), 좀 지나치게 검소한 차림새로 대충 가리고 나왔다가 은밀한 - 아직도 정말 '은밀'하게 취급되기나 하는가? - 부위가 노출되면 경악! 충격! 그리고 '이럴수가!'다. 그런 자발없고 천박하고 누추한 단말마적 표현, 아니, 비명들이 일상의 언어로 자리잡는다. 그 와중에서 죽는 것은 실제 메시지이고, 전달하고자 했던 마음이고, 가능한 한 더 적확하게 표현하려는 의도이다.



얼마전 아내가 시사인에 글을 하나 썼다 (원문은 여기). 동준이의 오티즘과 관련한 캐나다 체험을 요약한 내용이었다. 아내는 글이 개발괴발 됐다며 부끄러워 했지만, 내가 읽기에는 참 좋았다. 저쪽 반응도 괜찮았던 모양이다. 문제는 제목이었다. 'I love you' 카드에 엄마는 통곡했다, 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나도 이 순간을 소중한 기억으로 여전히 간직하고 있어서 더욱 생생하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아마도 그 노력의 90%는 선생님이었을, 동준이의 어머니날 카드를 보고, 아내와 나 모두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물을 글썽였던 그 순간. 잔잔한, 하지만 영원히 잊고 싶지 않은 고마운 마음... 


내 생각에는 그냥 '눈물', 혹은 '눈물 글썽' 정도였으면 좋았다. 오히려 그게 더 길고 잔잔한 여운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나 아내나, '통곡'에는 서투르다. 캐나다로 이민 온 지 10년이 넘은 탓도 있을 것이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 친구가 죽었을 때도, 이곳 사람들은 무척이나 감정을 아끼는 것처럼 보인다. 눈물을 흘리기는 하지만 절규하거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옷을 찢어가며 통곡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그렇게 하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남들이 보는 곳에서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혹은 멀리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다. 


때로는, 그저 한꺼번에 폭발시키는 것보다, 조금씩 조금씩 아껴 연소시키는 감정이 더 아름답다. 더 소중하다. 그만큼 더 오래, 더 곡진하게, 그 감정의 연원을 기억하고, 축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계속된다. 지금 일시에 소진해 버리면 다음이 너무 허전하고 허무해지지 않겠는가.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 ('사회 관계망 서비스'라고 번역하던데, 괜찮은 것 같다)에 글을 올릴 때, 나는 가능하면 형용사나 부사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감정 과잉이 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래도 때때로 너무 거칠고, 직설적이고, 노골적이라고 여겨질 때가 많다. 과잉 표현의 시대여서 그런가, 절제와 겸손의 미덕이 묻어나는 글을 보고 싶을 때가 많다. 나직한 목소리로, 과장하지 않고, 차분하고 절제된 표현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그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