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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시사인에 실린 엄마의 동준이 이야기

“동준아 ‘아~’해봐. 아~”

“……..”

“엄마 입 보고 따라 해봐. 아~~”

“……..”

“이렇게.. 아~~, 아~~”

“………….아….”


“…… 아빠! 동준아빠! 우리 동준이가 말을 했어!”


아이가 소리를 따라내기 시작한 건 만 네살이 지나서부터였다. 우리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한지 1년반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때다. 10년이 지난 지금, 내 무릎에 앉아 처음 ‘아~’ 소리를 따라했던 그 아이는 6척 장신의 고등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동준이의 언어능력은 여전히 유아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내 아이는 흔히 ‘자폐증’이라고 알려진 오티즘(Autism)이라는 전반적 발달장애를 갖고 있다. 


돌이 지나고부터  동준이는 아주 작은 소리로 “맘마” “엄마” “딸기” 라는 말을 했지만, 그걸 들어본 적은 도합 열 번도 채 되지 않았다.  두 돌을 넘겨서 소리도 몸짓도 흉내 내지 않는 아이를 보며 불안감이 커졌고,  이민 수속을 하는 와중에 소아정신과를 데려갔다. 당시 검사 결과 내려진 잠정적 진단은 전반적 발달장애의 일종인 ‘PDD-NOS’였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때 나는 그 발달장애 판정의 의미와 심각성을 완전히 깨닫지 못했던 것같다. 엄청난 충격이었다거나, 절망감을 느꼈다기 보다는 상황을 부인하고 과소평가하고 싶은 무의식이 더 강했던 듯하다. 만 3세가 되기 전에는 확진이 어렵다는 의사의 말에 혹시나 하는 희망을 걸었던 것일까? 혹은 이민 비행기를 타고 타국으로 날아가 살면서 시간이 지나면 마술처럼 아이의 장애가 사라질 거라고 스스로를 호도했던 것일까? 


이민과 동시에 대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남편이 영어로 강의를 들으며 학업과 씨름하는 동안,  나는 아이의 치료프로그램을 찾아나섰다. 대학 기숙사 아파트 1층에 있는 유아원 아침반에 다니면서 토론토시에서 운영하는 학령이전 아동을 위한 언어 서비스(Toronto Preschool Speech and Language Services)에 연결이 됐고, 12주동안 1주일에 한번씩 언어치료사와 만나 무료로 서비스를 받았다. 


일단 한 프로그램과 연결이 되고나자 계속해서 기를 쓰고 다른 기회와 다음 가능성을 찾았다. 발달장애아가 정상아동과 함께 다니며 언어를 배울 수 있는 특수유치원을 소개받아 등록했고,  어린이 전문 작업치료사를 찾아 치료를 다니기 시작했다. 온타리오주정부가 운영하는 발달장애 관련 서비스 대기자 명단에 들어가려고 캐나다 소아정신과 의사의 진단서도 다시 받았다. 이민 자금을 헐어, 1년에 6만달러 가량이 들어가는 행동치료센터에도 다니기 시작했다. 


정부가 지급하는 행동치료 서비스 보조금 대기자 명단에서 2년가까이 차례를 기다리다 만 6세가 되기 전 제외될 지경에 처했을 때는, 토론토 시의원을 찾아가 탄원하고 현지 신문 <글로브 앤 메일>과 인터뷰를 해 동준이의 이야기와 사진이 기사로 실린 게 영향이 있었는지 가까스로 지급대상에 포함됐다.  그후 동준이는 아빠가 직장을 옮겨 앨버타주로 이주하기 전까지 4년 가량 정부 보조금의 혜택을 받으며 행동치료를 계속할 수 있었다 (아래는 <글로브 앤 메일> 사진 기자가 찍은 사진들 중 하나. 막 여섯 살이 되기 직전이다). 



캐나다는 연방차원에서와 주차원에서 이중으로 장애복지 서비스가 제공되는데, 연방차원은 주로 세금면제와 혜택 성격이 강하고, 실질적인 발달장애 관련 서비스는 주정부의 재량과 관장하에 이뤄진다. 우리 가족은 남편이 정부기관에 근무하면서 더 좋은 기회를 찾아 이직하느라 온타리오주 토론토, 앨버타주 에드먼턴을 거쳐 지난해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밴쿠버로 옮겨왔기 때문에 뜻하지 않게 캐나다 3개 주의 서로다른 환경과 체제를 경험할 수 있었다. 


공통적인 것은 주정부들이 발달장애라는 사안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법제아래 서비스를 체계화했다는 점이다.  조기발견과 진단이 이뤄진 뒤에는 6살이 되기까지 집중적인 행동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상당한 금액이 지급되고,  취학한 뒤에는 홈캐어 보조와 커뮤니티 활동보조 등의 명목으로 지원이 이뤄지거나 매년 평가를 통해 특별 서비스로서 행동치료 지원이 연장되기도 한다. 성인이 되면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경우든 그룹홈에 들어가든 주거비와 생활 보조비가 지급되고 장애인 대상 데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대학진학, 직업훈련을 받고 취업을 하기도 한다.  


사회적으로도  1970년대에 오티즘 관련 교육과 훈련을 제공하는 국제적인 비영리기관( Geneva Centre for Autism)이 설립됐는가 하면, 종합병원에 전문 클리닉이 있어 학령기 발달장애아동들을 상담하고, 심리학자와 언어치료사, 작업치료사 등 전문인들이 참여하는 비영리 치료센터들이 개인 혹은 그룹대상의 교육과 훈련을 제공한다. 지역 레크리에이션 센터 등에 장애아들을 위한 체육프로그램과 레저프로그램들이 실시되고 대학들에서 장애청소년들을 위해 연중 체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가 하면 여름방학 캠프들을 개최하기도 한다. 2008년 앨버타주 에드먼턴에서는 대형 자동차 딜러십 소유주가 1백만 달러 상당의 대지와 현금을 한 행동치료센터에 기증해 화제가 됐다. 


캐나다가 선진국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정도의 진전과 정착이 이뤄진 것은 역시 부모들의 노력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미 1990년대 후반부터 부모들이 주축이 되어 치료센터나 특수학교, 체육재단 등을 설립했고 지역별로 네트워크를 형성해 정보제공과 교환, 지원은 물론 정부에 대한 압력단체 역할을 맡기도 했다. 캐나다 오티즘협회(Autism Society Canada), 오티즘 캐나다(Autism Canada) 등은 전국적인 민간 단체들이다. 

 

아이가 발달장애 진단을 받은 직후 이민해  캐나다에서 살았기 때문에 나는 한국에서는 어떻게 발달장애아를 치료하고 교육하고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한편으론 한국 사회의 발달장애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어느 수준인지도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