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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기사

이스터 섬의 비밀 벗긴다

석상 8백87개는 神의 지문? NEWS+ 1998년 5월21일치
美­칠레학자, 수십톤 무게의 ‘모아이’운반 수수께끼 풀기 시도

Source: http://www.tropicalparadise.net/images/dest/easterisland4.jpg

「테 -피토-테-헤누아」(Te-Pito-te-Henua). 「육지의 끝」이라는 뜻이다.

가장 가까운 육지 인 칠레에서 동쪽으로 3700여km, 가장 가까운 섬인 타히티에서 북서쪽으로 4000여km 떨어져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1722년 부활절에 유럽 인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이스터」라는 이름을 얻기 전까지, 이 외딴 섬은 그렇게 불렸다. 「큰 라파섬(島)」이라는 뜻의 「라파 누이」(Rapa Nui)도 1863년 이후부터 통용된 이름. 프랑스 령의 작은 폴리네시아 섬인 「라파」를 닮아 그 런 명칭을 갖게 됐다.

그러나 이스터섬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그러한 격절감이나 특이한 이름 때문이 아니 다. 그곳에 서 있는 800여개의 거대한 석상들 때문이다. 이들은 흔히 「모아이」(Moai)로 통칭 되는데, 평균 4m의 높이에 무게가 14t이나 될 만큼 거대하다. 개중에는 높이 22m, 무게 145~165t에 이르는 초대형 석상까지 있다. 이 들은 하나같이 바다를 등지고, 섬을 바라보는 자세로 서 있다.

섬의 역사와 운명…‘모아이’는 뭘까 
1722년 첫발견후 수난…삶과 죽음의 중개자 역할 추정

△이스터섬의 탐험가들
콜럼버스가 탐험을 나선 이후 수많은 유럽의 탐험가들이 바다로 나갔다. 1722년 부활절에 자콥 로게빈이라는 네덜란드의 탐험가가 이 외진 섬을 처음 발견했고, 이스터라고 명명했다. 두번째 탐험은 1770년 스페인의 돈 펠 리페 곤살레스에 의해 이뤄졌다. 이후 영국 탐험가 쿡(1774), 프랑스 탐험가 라 페루즈 백작(1786) 등이 이스터섬을 찾았다. 뉴질랜드의 학자 존 맥밀런 브라운이 처음으로 이스터섬에 대한 책을 쓴 것은 로게빈의 탐험으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1922).

△원주민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이스터섬 원주민들의 뿌리를 서기 400년경 도서(島嶼) 정복에 나선 폴리네시아의 항해자들에게서 찾는다. 그 보다 일찍 남아메리카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 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증거는 고구마인데, 이것은 남아메리카에 고유한 작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잖은 학자들은 폴리네시아와 페루 사이의 연관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물론 외계인이 이스터섬에 거석상을 건설했다거나, 이스터섬이 잃어버린 대륙의 한 파편이라는 주장도 있다.

△모아이의 의미
모아이를 조각해서 해변까지 이동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작업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치밀한 계획과 기술, 그리고 노동력이 요구되 는 일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을 벌였을까. 모아이가 가진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라파누이 원주민들의 신인가 우상인가, 아니면 지배자인가. 그도 아니면 원주민들의 조상을 상징하는 것일까. 오늘날 대다수 학자들은 모아이가 존경하는 조상에 대한 기념물이거나, 그들을 위한 비석으로 쓰인 것인지도 모른다고 추정한다.

모아이는 이승과 저승 사 이의 연결고리를 상징하는 것이거나 알려진 세계와 미지의 세계 사이의 중개자일지도 모 른다. 인류학자이자 작가인 조운 시버 커츠는 모아이가 지구와 우주, 삶과 죽음 사이의 중개자 구실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 이스터섬의 운명
유럽인들과의 첫접촉(1722년) 이전에 모아이 건설은 중단됐다. 1862년 페루의 노예들이 이스터섬에 침입, 학살을 저지르는 바람에 원주민의 인구가 3분의 2로 줄었다. 1877년 에는 111명까지 줄기도 했다. 1888년 칠레에 합병됐고, 이스터섬은 1935년 국립공원 겸 역사적인 유물로 지정됐다. 현재는 30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김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