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고아원 교도소등 찾아 순회연주 여는 우광혁씨 | NEWS+ 1997년 12월25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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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많은 꼬리표 중에서 정작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주는 것은 없는 듯하다. 그는 두달에 세번씩 「방문 연주회」를 갖는다. 병원이나 고아원, 마을회관, 재활원, 교도소 등이 그의 연주회장이다. 아니, 「빛소리 앙상블」의 연주회장이다. 빛소리 앙상블은 14명의 음대생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가 출강하고 있는 서울시립대 음대생들이 주축이다.
이들의 연주회장에는 휘황한 조명도 없고 그럴듯한 음향시설이나 잔향(殘響)도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교감과 따뜻함, 그리고 다른 곳에서 맛보기 어려운 감동이 가득하다. 『보통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평생의 꿈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낸다.
이들의 연주회장에는 휘황한 조명도 없고 그럴듯한 음향시설이나 잔향(殘響)도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교감과 따뜻함, 그리고 다른 곳에서 맛보기 어려운 감동이 가득하다. 『보통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평생의 꿈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낸다.
『비행기 추락사고로 부상한 하반신 마비 환자를 TV에서 본 일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 대소변을 가 리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고 말하더군요. 만약 하느님이 우리 소원을 듣는다면 아마도 그처럼 가장 절박한 사람의 소원을 먼저 들어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혜택을 베풀어야 할 사람도 그렇습니다. 바로 사회로부터 소 외된 이들, 경제적 시간적 정신적으로 음악회를 즐길 수 없는 사람들이지요』
그가 그늘진 곳을 찾기 시작한 것은 96년 봄이다. 당시에는 혼자서 교도소와 초등학교, 교회 등지를 찾아가 「음악의 이해」라는 주제로 강의 했다. 딱딱한 제목과 달리 그의 강의는 커다란 호응을 얻았는데, 무엇보다 고동으로부터 아코디언 실로폰 바이올린 피아노, 아프리카의 타악기 등에 이르기까지 80여가지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그의 다재다능함에 힘입은 바 컸다.
그 해 가을부터는 그의 「꾐」에 빠진 음대 제자들이 따라 나섰다.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남산원」이라는 고아원을 시작으로 전국 곳곳의 병원과 교도소 재활원 등에 임시 연주회장을 차렸다. 처음에는 멈칫거리며 마음의 문을 열지 않던 사람들도 이들의 진심어린 화음에 귀를 열었고 드문 공감의 체험을 얻었다.
『어릴 때부터 주변 빈민촌이나 기지촌 사람들을 따뜻이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아 왔기 때문 에 내가 하는 일도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겨진다』고 그는 말한다.
목사인 그의 부친은 충북 영월의 상동광산촌을 비롯해 궁벽한 시골의 개척 교회들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 지난해 은퇴했다.
「내림」인지는 몰라도 그의 가계에는 목사가 많다. 그의 부친이 그렇고, 큰 형이 그렇다. 심지어 그의 매형과 처외 삼촌까지 목사다. 『친척까지 모두 더하면 8명쯤이 목사이니 참 대단한 집안이죠』라며 그는 웃는다.
91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날 때만 해도 그의 꿈은 목사였다. 『80년대의 사회 상황에 많이 절망하고 괴로워했습니다. 대학 졸업후 기자 생활을 하면서 나름 대로 돌파구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지요. 마침 프랑스 유학길이 열려 민중신학 을 공부할 요량으로 무작정 짐을 꾸렸습니다』
80여 악기 다루는 귀재…음대생 14명과 함께 공연
그러나 그의 계획은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틀어지기 시작한다. 그가 유일한 재원(財源)으로 믿었던 한글 잡지 창간 계획이 돌연 취소된 것이다. 아내와 아이까지 거느린 그로서는 생존의 몸부림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퐁피두센터 앞에서 기타를 치기도 했고, 집 수리며 옷장 수리, 카펫 갈기, 한국 유학생 상대의 복덕방 운영, 이 삿짐 운반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프랑스 생활에 기반이 잡힐 즈음 그의 내면에서는 새로운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새롭다기보다는 오랫동안 숨어 있던 「생래적」 욕망, 음악을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서울대 음대 작곡과 81학번인 그는 학창시절 수업 잘 빼먹던 고성현 대신 노래를 불러도 교수가 깜빡 속을 만큼 목소리 좋은 바리톤이었다(조수미 김영환 주성혜 홍승찬 김대진 등 음악계에서 내로라 하 는 이들이 모두 81학번이다).
92년 6월 그는 소르본음대 대학원에 입학, 이듬해 석사학위를 받았고 곧이어 박사과정 코스워 크에 들어갔다. 뒤늦게 불붙은 향학열인 만큼 그 열기도 뜨거웠던지 그는 몇가지 음악 분야를 겹으로 공부했다. 쇼팽음악원에서 오케스트라 지휘법을 배웠으며, 크레티유 음악무용학교에서는 성악을 공부했다.
95년 6월, 그는 곡절많은 5년 간의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했다. 평소 존경하던 이강숙예술종합학교장의 귀국 권유가 결정적이었다. 이후 1년 남짓 이총장의 비서실장으로 일하다 올해 1월 예술연구소로 자리를 옮겼고, 지난 10월 그는 사표를 냈다.「좀 더 자유롭게 내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다 보니 그에게는 「고정된」일자리가 없다. 올해 4월부터 진행하고 있는 KBS 제1FM 라디오의 「FM 실황음악」이 그나마 안정적인 수입원 구실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는다. 『내가 쓸모있는 일을 하는 한 하느님은 나를 보살펴주신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가. 그는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생기발랄하다. 표정과 목소리, 몸짓이 다 그렇다.
그에게는 요즘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이 땅에 「장애인 예술학교」를 세우는 일이다. 매달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강동구 상일동의 주몽재활원에서, 소프라노로서 좋은 자질을 가진 장애인 여 자아이를 발견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국내에는 200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장애인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졌으면 서도 이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장애인이 많을 겁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런던이나 파리, 뉴욕에서 태어난 장애인은 사람으로 살고, 한국에서 태어난 장애인은 짐승처럼 산다는 말 이 있을 만큼 우리나라의 장애인 복지대책은 열악합니다』
그의 「장애인 예술학교」는 그러나 말처럼 거창한 것만은 아니다. 장애인을 수용하되, 그들에게 예술을 가르치자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할 겁니다. 재능있는 장애인이 서너명 정도 발견되면 그들에게 가 서 가르치고, 30~40명 수용할 수 있는 재활원이라도 만들게 되면 그곳이 곧 장애인 예술학교 아니겠습니까?』 김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