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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기사

문화 신대륙 '사이버 문화': 사이버 신세계는 오지 않는다 (NEWS+ 1997년 5월22일치)

* 뉴스플러스의 커버스토리였다. 이 기사를 보면서, 인터넷 지형의 변화상을 다시 확인함과 더불어, '사이버스페이스의 서부', '인터넷의 신개지'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됐음을 깨닫는다. 특히 저 아래, 독립 웹진이며 게릴라 웹사이트들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서, 상업성의 도도한 물결은 인터넷도 가만두지 않는다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웬지 서글픈 현실을 재삼 발견한다.

『인터넷과 전자적 문화가 인간의 본질을 바꾸지는 못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그것은 다만 삶의 「속도」를 변화시킬 따름이다. 전화기와 텔레비전을 생각해 보라. 그것으로 인해 우리 삶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는가?』... 지금 다시 들어도 절절한 현재성이 느껴지는 말이다.


"현실사회 외면한 사이버세계는 환상" - 인터넷과 전자적 문화는 인간의 본질 못바꿔 

사례 1. 
지난 4월 19명으로 구성된 미 퓰리처상위원회는 수상 부문에 「온라인 저널리즘」을 신설할 지를 결정하기 위해 소위원회를 따로 구성했다. 끊임없이 「올드 미디어」를 위협하던 뉴미디어가, 마침내 그 성역까지 건드리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온라인 보도가 수상작으로 뽑히는데는 적어도 1년 이상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 다. 소위원회의 검토 기간만을 따진 것이 아니다. 올드미디어 진영의 보수주의가 더 문제다.

    「와이어드 뉴스」에 따르면 뉴미디어를 통해 독점 보도된 2개의 기획보도가 이미 퓰리처상 후보에서 떨어졌다. 뉴욕타임스의 「사이버타임스」에 실린 포토에세이 「보스니아·불확실한 평화의 길」과 샬럿 선-헤럴드가 제작한 CD롬이 그 불운의 주인공들이다.

   핫와이어드의 미디어비평가 존 캐츠는 아예 뉴미디어만을 위한 새 상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올드미디어는 이미 주류(主流)가 아니다. 그들의 문법은 이 시대에 맞지 않으며 뉴미디어 를 평가할 능력도, 자격도 없다. 뉴미디어에 맞는 새 잣대가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2008년…인간은 컴퓨터와 살림한다”
사이버문화 전문가 故리어리 교수 예견 - “생활 절반은 가상공간서 보낼 것” 

    지난해 5월 75세로 세상을 떠난 티모시 리어리는 미국 대항문화의 우상 같은 존재. 하버드대 심리학교수였으나 수업 시간에 LSD(환각제)를 흡입해 의식의 확장을 실험하다 해직됐다. 그의 삶은 기성 문화에 대한 철저한 반대로 점철돼 있다. 닉슨이 대통령 시절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로 규정했을 정도.

    그가 「카오스와 사이버문화」(1994)에서 예견하는 미래상은 그의 급진성 만큼이나 충격적이 다(「사이버공간, 사이버문화」(문화과학사)에 번역돼 있다). 『즉각 말할 수 있는 답은 우리 종(種)이 우리의 커다란 두뇌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일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목에 힘준 ‘기성문화’ 갈아엎어?
‘스키조’‘이미지’등 웹진,억압된 현실 맹공 - 동성애 섹스 등 ‘금기’과감하게 다뤄 

    「디지틀Schi朝鮮」.

    웹진 「스키조」(Schizo·cgate.truenet.co.kr/schizo) 4월호 표지는 디지틀조선일보의 표지를 패러디한 것이다. 「콩글리쉬 전문 오형식 어학원」 「콩기름 인쇄」 「김현철 옥중 대선출마」 등 씁쓸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풍자와 비틀림이 홈페이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씁쓸함은 주로 패러디의 저급함으로부터 오는 것인데, 바꿔 생각하면 그처럼 「네 멋대로 해라」식 의 꼬집기와 비틀기야말로 인터넷의 사이버 환경이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사이버문화는 있는가?

    새삼스러운 질문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 그에 대한 정의는 나오지 않았다. '데모 문화', '쇼핑 문화'처럼 일종의 패션으로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일종의 은유로서 사용한다면, 또는 「컴퓨터 사용과 관련해 나타나는 여러가 지 사회적 현상과, 그를 소재로 삼는 문화적 생산과 소비」라고 정의한다면, 사이버문화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