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버시와 보안에 관한 컨퍼런스 (Privacy & Security Conference 2015)에 참석차 2월11일부터 13일까지 2박3일간 빅토리아에 다녀왔다. BC주정부에서 해마다 주최하는 행사로 올해가 열여섯 번째다. 나로서는 작년에 이어 두 번째. 3년 전엔가, 에드먼튼에 있을 때는 온라인으로 컨퍼런스의 주요 행사를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어정쩡하게 참가했지만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별로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 이후 온라인 참가 프로그램은 사라졌다).
작년 2월은 한겨울이었다. 그래서 아침에 빅토리아 내항 (Inner Harbour)를 돌 때도 퍽 쌀쌀하다는 느낌이었고, 군데군데 살얼음이 적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올해 2월은 천양지차다. 벚꽃이 활짝 피었다. 위 사진은 컨퍼런스가 열리는 빅토리아 컨퍼런스 센터 옆에 선 벚나무의 꽃. 벚꽃은 참 소담하면서도 예쁘고 청정한 맛이 있다.
어느 도시나 나라를 가든 그곳의 관청 건물, 특히 사법부 건물은 고풍스러우면서도 품격 있는 양식으로 보는 이들을 사로잡는다. BC 주의회사당도 예외가 아닌데, 이곳은 특히 어두워지면 건물의 형태가 고스란히 살아나도록 불을 밝혀서, 멀리서 보면 더 그럴싸하다. 내항 맞은 편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의사당 오른편에 선 박물관 모양의 건물은 동물 그림들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로버트 베이트먼이 지은 박물관이다. 이름도 '로버트 베이트먼 센터'.
사위가 어둑어둑해지는 저녁이 오면 BC 주의회사당은 이렇게 불을 밝힌다. 언제 봐도 아름답다
빅토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아니, 어쩌면 캐나다에서 가장 유명한 서점으로 꼽힐 '빅토리아의 먼로 서점' (Munro's Books of Victoria). 이 서점이 그토록 유명해진 데는 물론 저 먼로가 201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단편소설 작가 앨리스 먼로의 그 먼로이기 때문이다. 뒤에 이혼하기는 했지만 앨리스 먼로의 남편인 짐 먼로가 1963년에 이 서점을 열었고, 지난해 서점을 다른 사람도 아닌 서점 직원들에게 물려주겠다고 발표해 다시 한 번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서점 외양뿐 아니라 안도 여간 아름답지 않다. 30명쯤 되는 직원들은 손님들에게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다.
빅토리아 내항에 있는 수상 가옥들. 그리 호화스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못봐줄 정도로 허름하지도 않다. 저런 데 사는 기분은 어떨까, 저 집들 근처를 지날 때마다 문득 궁금해진다.
내항을 따라 난 보도는 '데이비드 포스터 항로'이다. 꼬불꼬불 난 트레일을 뛰는 재미가 그만인데 중간중간에 길이 끊어져서, 밴쿠버의 바닷길 (Seawall) 같은 맛은 덜하다.
그 내항을 따라 뛰다 보면 이런 풍경을 만난다. 멀리, 내륙 (Mainland)의 눈 덮인 산맥들이 보인다. 그 앞에 오도카니 선 이눅슉 (Inukshuk)이 문득 출장 온 나 자신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저녁에는 스카이프로 가족과 영상 통화를 했다. 카메라에 비친 자기 얼굴이 신기한 성준이는 온갖 익살맞은 표정을 짓기 바쁘고, 동준이는 동생이 신나하니까 자기도 덩달아 신나 한다. 함께 있으면 때로 귀찮기도 하고 짜증도 나지만, 떨어지면 곧바로 보고 싶고, 잘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출장 오면 늘 가족이 눈에 밟힌다. 맛난 음식이 나오면 함께 먹고 싶고, 그럴듯한 풍경이나 풍물을 보면 함께 보고 싶다.
드디어 출장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사실 이 사진은 출장을 가는 길에 찍은 것이지만... 아이고 이제 집으로 가는구나, 안도감이 든다. 1박2일이든 2박3일이든, 집을 떠나 객지에서 잠을 자는 일이, 점점 더 견디기 어려워진다. 심신 중 '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심'이 문제다. 가족이 그립다.
빅토리아가 밴쿠버 섬에 있다 보니 곳곳에 등대가 있는데, 그 중 이게 가장 예쁘고 그럴듯하다. 다만 배를 타지 않으면 일반 사람은 접근할 수 없다. 그저 수상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 보면서, '저런 데 살며 일하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잠깐 궁금해 할 뿐이다.
이제 다 왔다. 왼쪽으로 사진처럼 노쓰밴쿠버 시가지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스탠리 공원을 넘으면 수상 비행기 이착륙 장이 나온다.
빅토리아에서 밴쿠버까지 정확히 얼마나 먼지, 내가 탄 수상비행기는 또 얼마나 빨리 나는지 궁금해서, 평소 달리기와 자전거 타기에 이용하는 가민 GPS 시계를 켜봤다. 그 결과 총 거리는 130 km, 비행 시간은 총 30분 정도, 순항 속도는 시속 200 km 안팎, 비행 고도는 2,000 m 정도였다.
올해 컨퍼런스 행사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를 한 대목은 콜럼비아대 팀 우 교수의 기조 연설이었다. 그의 책 'The Master Switch'를 퍽 인상적으로 읽은 데다 - 아직 다 끝내지는 못했다 - '망 중립성' (Net Neutrality)에 관한 그의 글, 그의 인터뷰 등을 비교적 관심 있게 읽어 온 터여서 (사실은 그가 바로 '망 중립성'이라는 말 자체를 지어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꽤 큰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강연은 기대한 대로 퍽이나 흥미로웠다. 채 한 시간도 안되는 짧은 연설 시간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망 중립성과 관련해 들려준 관찰과 관측, 통찰은, 그가 얼마나 명민하고 뛰어난 학자인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예상대로, 그의 짧은 강연이 끝난 다음 그의 책에 대한 사인회가 있었다. 이미 킨들 판 전자책을 샀지만 종이책을 또 샀다. 그리고 사인을 받았다. 책을 무척 인상 깊게 읽었노라고 했더니 무슨 내용이 가장 좋았느냐고 되물었다. 순간 당황해서 좀 버벅거렸지만 결국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것, 역사의 아이러니, 뭐 그런 걸 느꼈고, 무엇보다 과거의 역사가 그 모양만 달리해서 현재에 다시 재현된다는 점을 재미난 사례들로 풀어낸 것이 더없이 흥미로웠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고맙다며, 자신도 이 책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몇 개월 안에 후속편이 나올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사실은 지금 호텔 방에서 원고 다듬는 중"이라며 웃었다. 위 사인의 'Remember the cycle'에서 'cycle'은 바로 그와 같은, 새로운 산업이 출현해서 겪게 되는 변화, 혹은 진화의 양상을 축약하는 핵심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 또한 그러한 '사이클'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뜻이다.
바로 그 책. "The Master Switch." 전신전화, 라디오 시대가 처음에는 기업가 정신, 발명가 정신으로 충만한 여러 개인들에 의해 자유로우면서도 독립적으로, 거의 혼돈 상태로 난립하면서 성장했지만 몇몇 대기업들이 경쟁사들을 집어삼키면서 과점화, 더 나아가 독점화하고, 거기에 정부의 다양한 규제가 개입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전기통신 산업, 영화 산업, TV 및 라디오 산업으로 순치되었음을 다종다양한 역사적 사례와 일화들로 보여주면서, 인터넷 산업의 양상 또한 그러한 길을 걸으리라고, 지은이 팀 우는 전망한다. 큰 흐름의 특징과 핵심을 잡아내면서도, 그 안에 아기자기하고 드라마틱한 일화들을 풍부하게 곁들여, 읽는 재미가 쏠쏠한, 그야말로 양서다.
또 한 사람의 유명 인사가 바로 이 분이다. 스탠포드대 법대의 라이언 케일로 (Ryan Calo) 교수. 무인 감시 비행물체인 드론 (Drone) 분야의 전문가이다. 드론이 미치는 사회적, 정치적 영향, 특히 프라이버시에 끼칠 영향을 심도 깊게 연구하는 분. 역시 흥미로운 강연이었는데, 이번에도 너무 짧아서 아쉬웠다. 좀 길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