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침묵’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극 중에서 ‘Hannibal the Cannibal’로 불리는 광기의 식인 천재 –– 심리학자 한니발 렉터를 연기한 앤소니 홉킨스다. 그의 연기는 워낙 섬뜩하게 인상적이었고, 1991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의 영예로 이어졌다. 오죽하면 미국영화협회(American Film Institute)가 뽑은 역대 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악역 1위에 뽑혔을까! 참고로 2위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에 나오는 노먼 베이츠, 3위는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이다.
온라인 비디오 사이트인 넷플릭스를 뒤적이다 우연히 양들의 침묵을 다시 보게 됐고, 새삼 홉킨스의 귀기 어린 연기에 빠져들었다. FBI 신입 요원 클라리스 스탈링 역을 맡은 조디 포스터의 퍼포먼스도 수준급이었지만 홉킨스의 연기와 내공이 워낙 강력했다. 상대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을 것 같은 광기 어린 눈빛, 자유자재로 강약완급을 조절하며 대화의 - 그리고 영화 전체의 - 긴장감을 들었다 놨다 하는 가공할 발성은, 보는 사람의 심장마저 쥐락펴락 하는 듯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어떤 내용일까? 영화와 얼마나 다를까?
토머스 해리스의 원작 ‘양들의 침묵’을 아마존의 전자책으로 구입해 읽기 시작했다. 영화의 줄거리와 너무나 흡사한 데 놀랐다. 아니, 소설의 내용이 영상으로 얼마나 충실하게 옮겨졌는지를 확인하고 많이 놀랐다. 특히 두 주인공, 한니발 렉터와 클라리스 스탈링의 캐릭터 묘사는, 마치 본래 그림 위에 투명 습자지를 놓고 줄을 따라 그린 것처럼 정확했다. 대사까지 똑같았다. 아니, 홉킨스의 숨막힐 듯한 명연을 고려하면, 그 반대로 표현해야 맞을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본래 그림이고, 소설이 투명 습자지 위의 복제판이라고…
물론 소설 전체를 영화로 떠오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을 테고, 길어야 두 시간, 두 시간 반밖에 안 되는 영화에서 긴장감과 속도감, 또 이야기의 집중도를 살리자면 다소 부차적이라고 여겨지는 대목을 줄이거나 아예 빼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빠져서 아쉬운 대목은 스탈링의 보스인 잭 크로포드라는 캐릭터가 더 깊이 있게 그려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소설에서는 스탈링에 대한 크로포드의 복잡미묘한 심리가 퍽 흥미롭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작 소설을 읽고 난 느낌은 ‘양들의 침묵’이 ‘원작을 가장 충실하고 훌륭하게 옮긴 영화들’ 중 하나라는 데 아무런 의심의 여지도 없다는 것.
영원한 세상 (World Without End)
‘영원한 세상’은 영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켄 폴렛 (Ken Follett)의 동명의 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8부작 미니 시리즈이다. 제목 ‘World without end’는 뜻은 단순해 보이지만 성서에 그 출처를 둔, 퍽 의미심장한 표현이다. 성서 에베소서 3장21절 ‘Unto him be glory in the church by Christ Jesus throughout all ages, world without end. Amen.’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리고 이사야서 45장 17절 ‘But Israel shall be saved in the Lord with an everlasting salvation: ye shall not be ashamed nor confounded world without end.’(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입어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영세에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에 나오는 말을 따온 것이다. 그러니 구원 받은 세계, 영세 등의, 종교적 함의를 많이 품고 있다고 봐도 되겠다.
또 이 소설의 내용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이 말은 영세와 구원의 메시지로 위장한, 성직자의 탈을 쓰고 온갖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역설적으로 빗댄 말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갖은 부조리와 비극적 아이러니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이어지고 지속되고 흘러가는 인간의 강퍅하고 부박한 삶을 표현한 말로 해석되기도 할 것이다. 세상은 끝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그 세상을 사는 인간의 희비극 또한 그러하리라는…
넷플릭스로 감상한 ‘영원한 세상’은 모두 8편으로 짜여 있고, 각 에피소드의 분량은 50분 정도 된다. 영화의 배경은 14세기 중반, 영국 런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묘사된 가상 도시 ‘킹스브리지’(Kingsbridge)이다. 드라마는 에드워드 2세가 아내인 ‘프랑스의 이사벨라’ 왕비와의 왕권 다툼에서 패배해 왕권을 양도하고, 왕비는 아들을 허울뿐인 왕위에 앉힌 뒤 섭정을 시작하던 1327년의 사건으로 시작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 (1337~1453)이 시작되고, 이어 흑사병(1348–50)이 쓰나미처럼 유럽을 덮쳤던 시절, 독립심 강하고 명민한 카리스 (샬럿 라일리)와, 훗날 최고의 건축가로 성장하는 머씬(Merthin, 탐 웨스턴-존스)의 곡절 많은 로맨스를 중심으로, 수도승, 수녀, 백작, 기사, 상인, 농노 등 중세 시대의, 한편으로는 기막힐 만큼 단순하고 무지몽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복잡 다단한 종교적, 정치적 아귀다툼과 그 틈바구니에서 지향없이 흔들리고 억압받고 희생되는 민중의 삶이 그려진다.
요한 호이징가의 명저 ‘중세의 가을’ (최홍숙 역, 문학과 지성사, 1992년)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좀 길지만,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이보다 더 기막힌 요약은 없다고 생각해 여기에 인용한다. ‘제1장 삶의 쓰라림’에 나오는 대목이다.
‘세계가 지금보다 5세기 가량 더 젊었을 때, 삶에 일어난 많은 일들은 지금과 현저히 다른 모습과 윤곽을 띠고 있었다. 불행에서 행복까지의 거리도 훨씬 멀게 여겨졌고, 모든 경험은 기쁨과 고통이 어린 아이의 정신 속에서 갖는 것 같은, 그런 즉각적이고도 절대적인 강도를 띠었다. 매 행동과 매 사건들은 언제나 일정한 의미를 갖는 형식에 둘러싸여졌고, 또 그 형식들은 거의 의식(儀式)의 높이에까지 올려졌다. 탄생과 결혼과 죽음 등의 주요 사건들은 성례(聖禮)를 통해 신비의 후광을 띠었고, 여행, 직무, 방문 같은 대단치 않은 사건들조차도 강복식(降福式)이니 의례(儀禮)니 서식(書式) 따위를 동반하였다.
재난과 빈곤 같은 것도 그것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오늘날보다 훨씬 적었다. 그것은 훨씬 더 무섭고 잔혹했던 것이다. 질병과 건강은 훨씬 더 뚜렷한 대조를 보였고, 겨우내 추위와 어두움도 훨씬 더 쓰라리게 느끼는 고통이었다. …’
드라마도 고증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특히 켄 폴렛의 원작 소설이 그리는 중세 시대의 삶은, ‘중세’라고 할 때 흔히 느끼곤 하는 낭만성이나 향수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멀다. 특히 귀족 계급이나 종교인 그룹에 소속되지 않은 양민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곤고하고 척박하기만 하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손과 얼굴은 매일 한 번씩, 그리고 쉽게 악취가 날 수 있는 신체 부위는 일주일에 한 번씩 씼었다. 온몸을 씻는 목욕은 기껏해야 1년에 두 번쯤 있는 관례였다'라는 대목을 읽을 때는 괜히 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들이 사는 집을 비롯한 여러 일상사에 대한 폴렛의 묘사는 매우 현실적이다.
드라마를 찍은 곳은 헝가리라고 한다. 2011년에 찍었고 2012년 9월에 처음 방송되었다.
세상의 모든 수수께끼는 탐구하고 고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무작정 수용해야 할 ‘신의 뜻’이다. 흑사병은 인간이 저지른 원죄 때문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여성은 그저 결혼해서 애 낳고 기르고, 남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는 2등 인간일 뿐이다. 그런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머씬을 깊이 사랑하면서도 결혼을 마다고 기존의 종교적, 정치적 권위에 종종 반기를 들고 의문을 품는 카리스의 삶이 결코 평탄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원작 소설 ‘영원한 세계’는 길다. 1000페이지가 넘는다 (약간 과장하면 ‘영원한 소설’ (Novel without end)이라고 제목을 붙여도 될 듯싶다). 50분짜리 드라마 여덟 편으로 소설을 옮겼지만 전체를 그대로 수용하기는 애당초 불가능한 시도로 보인다.
소설의 내용을 전혀 모른 채 드라마부터 봤다. ‘World without End’와, 이 소설의 전작으로 국내에도 ‘대지의 기둥’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The Pillars of the Earth’가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었다. 켄 폴렛이라는 소설가가 생소한 탓도 있었을 테다 (한국 번역서에는 '폴릿'이라고 돼 있는데, 그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지는 유튜브만 잠깐 확인해도 금방 알 수 있었을 터여서 아쉬움이 남는다).
드라마는 의외로 재미있었다. 흡인력이 대단했다. 100년 전쟁을 둘러싼 왕권 다툼과 흑사병의 재앙(‘블랙 데스’)이라는 거시적 틀 안에, 킹스브리지라는 소규모 도시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대도시로 여겨졌을 것이다)에서 벌어지는 여러 계급, 계층 간의 시기, 갈등, 애증, 암투라는 미시적 에피소드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과 당대 풍습과 생활상의 충실한 고증으로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었다 (등장인물들 간의 얽히고 설킨 복잡다단한 관계의 거미줄은, 혹시 '막장 드라마'의 원조가 중세 시대는 아니었을까, 라는 허튼 의문을 떠올릴 정도였다 하하).
드라마 속에 빠져드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원작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양들의 침묵’처럼 영화와 소설이 거의 판박이처럼 일치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슬몃 고개를 들었다. 드라마 후반부를 장식하는 몇 차례의 극적 반전과, 주요 인물들의 운명을 확인하고 난 다음이라, 소설을 읽는 맛이 반감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드라마와 소설은 표나게 달랐다. 전혀 다른 작품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게 해줄 정도로 드라마와 소설은 그 전개와 결말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였고, 각기 독특한 흥미를 안겨주었다. 카리스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는 과정, 소설에서 ‘악의 축’이라 할 만한 킹스브리지 수도원장 갓윈(Godwyn)과 그 어머니 페트라닐라의 최후는 소설에서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갓윈의 꼭두각시 조수인 필레몬은 드라마와 소설에서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그 역할이 갈렸다. 드라마에서 매우 중요한 배역으로 굉장한 비밀을 간직한 전직 기사 수도승인 토마스 랭리의 비중은 소설에서 도리어 미미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대목들이 그런 식이었다.
요약하면, 드라마는 소설의 큰 틀만 가져와서 아예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하긴 소설을 그대로 가져오기에는 드라마에서 요구되는 극적 긴장감과 짧은 시간 간극을 해결하기가 어려울 듯했다. 비교한다면 영화 ‘반지의 제왕’ 1편에서 호빗 프로도가 빌보 배긴스의 생일 직후 반지 대장정을 떠나는 것처럼 그려진 상황이 원작 소설에서는 50년이나 걸렸다는 점과 비슷할 것이다.
‘영원한 세상’ 드라마와 소설을 통해 정말 뒤늦게, 켄 폴렛이라는 작가를 만났다. 1000페이지가 넘는다고 했지만 너무 길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마치 스티븐 킹의 ‘언더 더 돔’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14세기 중세 시대의 킹스브리지에 사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에서 벗어나는 게 더없이 아쉬웠다.
다음에 읽을 소설은 자연스레 결정되었다. ‘The Pillars of the Earth.’ ‘영원한 세상’의 시대적 배경보다 150년쯤 전 상황이다. 이번에는 소설을 먼저 보고 나서, 이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를 볼 생각이다. 여러 자료를 종합하건대 ‘대지의 기둥’은 ‘영원한 세상’보다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예컨대 IMDB의 네티즌 평을 보면 전자는 10점 만점에 8.2점으로 후자의 6.9점을 월등히 앞선다. 기대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