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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th and the Afterlife (죽음과 후생)

제목: 『Death and the Afterlife』(죽음과 후생)

지은이: 새뮤얼 셰플러 (Samuel Scheffler)

분량: 224페이지

출판사: 옥스포드 대 출판부

출간일: 2013년 9월18일


나보다 더 소중한 타인

뉴욕대 철학과에서 윤리 철학과 정치 철학을 연구하는 새뮤얼 셰플러 (Samuel Scheffler) 교수는 ‘후생’ (afterlife)을 믿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셰플러 교수의 ‘후생’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이나 구원, 불교에서 주장하는 윤회나 해탈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죽음 뒤의 세상, 혹은 저승 세계 – 그것이 천국이나 연옥, 혹은 지옥이든 –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셰플러 교수의 ‘후생’은 실상은 나와는 무관하다. 내가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이어질 타인들의 삶, 내 뒤에 남은 인류의 집단적 삶을 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셰플러 교수의 ‘후생’은 ‘그러나 삶은 언제나 계속될 것이다’ (but life will always go on)라고 말할 때의 그 집단적, 집합적 삶을 가리킨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가 죽은 뒤에도 다른 사람들이 계속해서 삶을 이어가리라는 점을 기정 사실처럼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셰플러 교수의 주장에는 별로 새로울 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설령 개인적 후생은 믿지 않더라도,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내 후손들, 그리고 내가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인류의 ‘집단적 후생’(collective afterlife)은 계속 이어지리라는 점은 믿기 때문이다. 


셰플러 교수의 주장이 새롭고 독창적이라고 여겨지는 대목은 그 다음이다. 그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치부하는 그 믿음이 우리에게, 우리의 현재의 삶에 주는 영향력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유의미하다고 주장한다. 어떤 점에서는, 우리가 만나본 적도 없고 –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 만나볼 수조차 없는 타인들, 그래서 그저 ‘인류’나 ‘사람’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집약되는 사람들이, 우리 자신의 존재나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 친구들의 존재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셰플러 교수는 말한다. 그들의 존재, 다시 말해 인류가 미래에도 계속해서 존재하고 생명을 이어갈 것이라는 ‘기대’가 사라지면 우리 삶의 의미 또한 좌절되고, 우리가 삶의 여러 국면들에 부여했던 가치들도 그 빛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내가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예상 – 늘 죽음을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 은, 우리가 현재의 삶에 부여하는 여러 가치들을 소멸시키지 않는다.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자각과 그에 따른 두려움도 크지만, 인류 전체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깨달았을 때 초래되는 공포, 그것이 온갖 가치들로 충만한 우리의 삶에 끼치는 치명적 영향력은 더 크다는 것이다. 


셰플러 교수의 ‘사고 실험’

셰플러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두 가지 ‘사고 실험’, 혹은 가상의 시나리오를 제안한다. 그 중 하나는, 당신은 당신의 수명을 다하고 평안한 죽음을 맞겠지만, 전 인류는 그로부터 30일 뒤, 지구가 거대한 혜성과 충돌하는 바람에 멸절할 것이라는 점을 당신이 알았다고 가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재앙의 미래를 상정한 P. D. 제임스의 소설 (그리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칠드런 오브 멘’ (Children of Men)의 시나리오이다.


먼저 첫 번째 시나리오. 내가 죽은 지 30일 뒤에 인류 전체도 멸망하리라는 점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떤 심리적 영향이나 행동의 변화를 겪게 될까? 나는 그런 묵시록적 미래의 희생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안도하면서, “어쨌든 내가 죽은 뒤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라고 생각하게 될까? 그럴 수도 있겠다. 셰플러 교수의 ‘후생론’에 대해 반박 이론을 전개하는 수전 울프, 해리 프랑크푸르트 등 다른 전문가들도 그와 비슷한 추론을 보여준다. 


셰플러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설령 내가 죽은 다음이고, 따라서 나 자신의 삶에는 아무런 물리적 영향을 미치지 않더라도, 불과 30일 뒤에 전 인류가 지구 상에서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지식은 지금 현재의 내 삶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만약 내가 암 치료 연구자라면 그런 연구 작업을 계속할 동기를 잃어버릴 것이다. 글이나 말로 명백히 표현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내가 그런 연구를 계속해온 배경에는 설령 내 생애 동안 암 완치의 길을 찾지 못하더라도 다음 세대, 혹은 그 다음 세대의 연구자들이 내 연구 작업을 바탕으로 결국 길을 찾아낼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교량의 내진을 연구하는 공학자나 부조리한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투쟁하는 정치 활동가, 혹은 더 아름답고 견고한 건축물을 디자인하려 노력하는 건축가, 명작을 쓰려고 머리를 싸매는 작곡가나 소설가, 시인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그런 노력을 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한 달 뒤면 인류가 멸절하고 말 텐데? 이런 활동이나 노력들은 부지불식간 미래의 이용자, 관객, 독자를 상상하고, 그들의 존재를 당연한 조건으로 상정한 상태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그 ‘미래’나 ‘미래의 인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모든 동기와 의욕, 의지는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게 분명하다. 


그러한 목적 의식의 상실에 대한 반응은, 나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대한 반응과는 사뭇 다르다. 물론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어떻게든 죽음의 순간을 늦추려 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리고 종교적 영생이나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개인적 죽은 뒤에도 여전히 일정한 가치를 지닐 것이고 인류의 복지와 개선에 기여할 것이라는 확신은 잃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의 죽음 뒤에도 계속될 다른 사람들의 생존은 우리 자신의 생존보다도 더 큰 의미를 갖게 된다.


P. D. 제임스의 소설 ‘칠드런 오브 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에서 따온 두 번째 시나리오는 셰플러 교수의 주장에 더 풍부한 맥락을 부여한다. 2027년의 인류는 불임(不妊)으로 후생을 이을 능력을 상실했다. 지난 25년 간 단 한 명의 아이도 태어나지 않았다. 당신이 그런 상황에 놓였다고 상상해 보자. 지구 상의 사람들 중 25세 미만은 존재하지 않고, 고령 인구가 가차없이 사라져 가면서 인류의 종말도 점점 더 가까워진다.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첫 번째 혜성 충돌 시나리오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회 활동은 점점 더 그 의미를 잃어갈 것이다. 암 연구, 내진 능력을 높이는 교량 건설, 정치 사회 활동, 창작 활동 등등. 제임스는 소설에서, 돌이킬 수 없는 전지구적 차원의 불임이 인류 전체에 전염병처럼 퍼뜨리는 우울증과 불안감, 절망감을 묘사한다. 어떤 이들은 종교에서 위안과 구원을 얻으려 하고, 다른 이들은 음악을 듣거나, 자연 속을 탐험하거나,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또는 음식과 술에서 즐거움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어떤 행위든 그로부터 얻는 만족감은, 필연적으로 임박할 인류의 종말에 대한 예감 때문에 어딘가 부족하고, 어딘가 허전하고, 슬프고, 고통스럽다. 


이 시나리오가 혜성 충돌 시나리오와 다른 점은 아무도 때이른 죽음을 맞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느끼는 삶의 무의미성과 절망감은 나나 내 가족, 친구가 급작스러운 비극적 죽음을 맞으리라는 예상 때문은 분명 아니다. 그 무의미성과 절망감은 인류의 삶을 이어갈 후생 – 아기 – 이 더 이상 나오지 않으리라는 점에서 나온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지식은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일상에서 부여하는 여러 가치나 확신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가 더 이상 존속하지 못하리라는 지식은 우리의 삶, 그 삶에서 추구하는 여러 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이기주의(egoism)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개념이라고 셰플러 교수는 말한다. 우리 각자가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거나 자기 도취적이든, 우리가 삶에서 목적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은 결국 우리의 죽음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예상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다. 


셰플러 교수는 또, 인간의 개인주의 (individualism)도 비슷한 맥락에서 지나치게 단순화 된 평가를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인류 개개인이 다종 다양한 가치와 목표를 가지고 있고, 어떤 것이 바람직하고 가치 있는 삶이냐는 판단도 개개인에게 달려 있지만, 결국 그 목표와 가치는 ‘그래도 삶은 늘 계속된다’라는, 인류의 지속성에 대한 믿음의 틀 안에 놓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틀이 사라지는 순간, 삶의 가치와 목적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약화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셰플러 교수의 결론을 요약하자면, 우리가 가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개개인의 삶과 죽음보다 ‘인류’ (humanity)로 집약되는 다른 사람들의 집단적 삶, 곧 ‘후생’ (afterlife)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 ‘죽음과 후생’은 미국의 명문 UC 버클리에서 진행한 셰플러 교수의 두 차례 강연과 더불어, 그의 독창적이고 참신한 이론과 주장에 대한 내 명의 동료 교수, 철학자들 – 해리 프랑크푸르트, 수전 울프, 니코 콜로드니, 시나 시프린 - 의 반박, 그리고 그에 대한 셰플러 교수의 재반박을 담고 있다. 


결론

개인의 죽음,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 이어질 것으로 가정되는 – 집단, 혹은 집합적 의미로서의 인류의 삶 (후생, afterlife)이 개인의 현재의 삶과 목적에 어떤 의미와 영향을 지니는지를 독창적 시각과 사고 실험을 통해 탐구하는 셰플러 교수의 강의는, ‘소셜미디어’로 상징되는 극단적 이기주의와 자기 도취주의가 도도한 물결처럼 사회를 장악해 가는 현대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어떤 면에서 인류의 그리 밝지 못한 미래에 대한 경종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의 주장에 대한 다른 전문가들의 비평과 반론은 주장의 일방성을 견제하면서 적절한 균형을 잡아준다. 


강연 내용을 옮긴 글이어서 대화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문장은 평이하면서도 침착하고 친절하다. ‘주장’이라고 표현했지만 도그마적인 강요의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다른 철학자들과의 반론, 재반론 내용 또한 우호적이고 상대에 대한 존경의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스테디셀러로서의 가치와 전망이 높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