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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회의

출근길, 버스에서 내려 2, 300 m 바다쪽으로 걸어내려가면 보이는 사무실 풍경. 일곱시 무렵이다. 뒤에 보이는 'Province'라는 표지를 단 빌딩은 밴쿠버 지역의 양대 일간지 - 하지만 모회사는 같다 - '밴쿠버 선'과 '더 프라빈스'의 건물이다.


새 직장에서 일한 지 꼭 두 달이 됐다. 아직 여러가지로 헤맨다. 일이 달라 헤매고, 직장 문화가 달라 헤맨다. 누가 누군지 파악 못해 헤매고, 어디에 어떤 양식을 써야 할지 몰라 헤맨다. 분야 자체는 '프라이버시', 혹은 '정보 프라이버시'라는 말로 넓게 포괄될 수 있으므로 언뜻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 속내는 많이 다르다. 심지어 관련 법의 내용에도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작업의 강도와 밀도이다. 이미 모든 정책과 규정과 가이드가 정해져 있고, 오랜 타성과 관성에 의해 굴러가는 정부 기관에서는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하거나 일을 벌이기가 쉽지 않다. 시작만 해놓고 용두사미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이곳은 다르다. 캐나다 연방정부로부터 BC 지역 원주민들에 대한 의료 서비스 업무를 공식적으로 이관 받은 것이 지난 10월1일이었으니 공식 날짜로는 내가 근무한 일수보다도 도리어 하루 더 짧다. 물론 그런 이관에 필요한 기초 작업은 몇 년에 걸쳐 꾸준히 진행되어 왔고, 그에 요구되는 여러 공식 협정과 협상도 비슷한 기간 동안 진행됐지만, FNHA라는 공식 기관으로 출범한 지는 겨우 두 달밖에 안된다. 그러니 모든 일이 다 새롭다. 가령 내 경우, 온타리오 주정부나 알버타 주정부에 들어갔을 때 프라이버시 프로그램이나 정보 공개 프로그램은 이미 다 구성된 상태였고, 내 일은 그 프로그램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프로그램을 내가 짜야 하는 상황이다. 


지난 두 달 동안 프라이버스 프레임워크를 짰고, 프라이버시 정책을 개발했고, 프라이버시 침해 대비 가이드를 만들었고, 주요 프로젝트와 이니셔티브에 대한 '프라이버시 영향 평가' (Privacy Impact Assessment)를 진행했다. 그 외에도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수많은 작업을 '처음부터' 시작했다. 그 만큼 정신없이 바빴고, 바쁘다. 일 자체가 주는 스트레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마음은 편안하고 뿌듯하다. 하는 만큼 흔적이 남고 성과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좋은 직속 상관을 만나는 행운까지 안았다. 프라이버시 프로그램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을 아끼지 않고, 큰 줄거리만 잡아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며 맡겨두는 스타일이다. 


또 한 가지 표나게 다르다고 느끼는 것은 회의 문화다. 온타리오와 알버타 정부 부처에서 일할 당시 회의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만만찮았었다. 회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진행 방식과 시간 때문이었다. 뚜렷한 내용도 없이, 회의를 위한 회의, 혹은 심하게 말하면 시간 때우기 식의 회의가 적잖았고, 대체 목적과 의도가 불분명한 경우가 너무 많았다. 회의가 예정된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다. 졸가리가 있으면서 예정보다 길어지면 참을 만하다. 하지만 아무런 내용도 알맹이도 없이 질질 시간을 넘기는 회의는 정말 참기 어려웠었다. 


여기서는 그런 일이 없다. 회의 예정 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거의 없다. 설령 시간이 초과되는 경우라도 10분 이상을 넘지 않는다. 누가 회의를 주관하든, 어떤 주제와 목적의 회의든, 정해진 회의 시간을 칼같이 지킨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든 회의가 그렇게 절도를 보인다. 나는 새 직장의 그런 회의 문화가 낯설면서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30분이면 30분, 한 시간이면 한 시간, 정확히 회의를 시작하고, 정해진 시간 안에 회의를 마친다. 그래 이래야 마땅하지.


사무실 창밖 풍경


11월이 다 갔다. 주말이 지나면 12월이다. 새 직장을 다닌 지 두 달이 됐다는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뭔가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강박감에, 두서없는 글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