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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드럼헬러


캐나다의 크고 작은 도시들에는 유난히 '무엇무엇의 수도' (... Capital of Canada, 혹은 World) 같은 자가발전형 칭호가 많다. '랍스터의 수도', '나무들의 수도', '토너먼트의 수도', '와인의 수도', '미네랄의 수도, '중유의 수도', 심지어 '하루살이(shadfly)의 수도'도 있다. 드럼헬러는 '세계 공룡의 수도' (Dinosaur Capital of the World)를 자임하는데, 대개는 그 명칭이 스스로를 과대포장하게 되는 경우와 달리, 이곳만은 명실상부한 '세계 공룡의 수도'라고 할 만하다. '공룡의 계곡' (Dinosaur Valley)이라는 별칭이 시사하듯, 드럼헬러는 그야말로 공룡의 천국, 아니 공룡 화석의 보고다. 전세계 어느 곳도 드럼헬러에 버금갈 만한 양과 질로 공룡 뼈를 묻어두고 있는 곳은 없다. 



알버타 주에 온 지 4년여 만에, 그리고 공교롭게도 막 알버타 주를 떠나려는 마당에 이르러서야, 드럼헬러를 찾았다. 편평하고 비옥한 들판을 가로질러 한없이 길게 뻗은 편도 1차선을 타고 드럼헬러로 가는 길은 한적하고 쾌적하고 평화로웠다. 양옆으로 펼쳐진, 누렇게 익은 곡물, 가을햇볕에 말라가는 동글동글 바퀴처럼 둥글게 뭉쳐놓은 건초들의 풍경이 참 아름다웠다. 



공룡은 드럼헬러에서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눈이 닿는 곳마다 혹은 조악하거나 혹은 정교한 모습의 온갖 공룡들이 서 있었다. 여관 앞, 식당 앞, 선물가게 앞, 일반 가정집 앞, 도로가 갈라지는 곳 근처 등등... 마치 드럼헬러가, 아니 드럼헬러의 주민들이 공룡들을 기반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위 사진은 드럼헬러의 여행 정보 센터 입구의 거대 공룡 T-렉스로, 우리는 저 입까지 올라가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아래 사진). 가족 4인 입장료가 10달러였다. 



그리곤 드럼헬러의 하이라이트인 '로열 타이렐 박물관' (Royal Tyrell Museum)을 찾았다. 모형이나 모방물, 조악한 조형물이 아닌, 진짜 공룡 뼈들을 발굴해 진열한 '원조 공룡 박물관'이었다. 



로열 타이렐 박물관은 공룡 뼈가 풍부하게 발굴되는 '공룡 계곡'에 자리잡고 있었다. 단정한 현대식 건물 안에 갖은 공룡 화석이 경이로울 만큼 정교하게 복원되어, 방문객들을 감탄시키고 감동시키고 있었다. 박물관을 둘러본 나의 인상은, 이 로열 타이렐 박물관이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가본 모든 박물관들 중 가장 경이롭고 감동적인 곳이며, 세계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찾아와 봐야 하는 장소라는 것이었다. 저 거대한 괴수/동물의 뼈가, 수천만 년의 시간을 통과해 지금 내 눈앞에 서 있었다. 혹은 누워 있었다. 저 막대한 크기, 저 압도적인 규모, 저 엄청난 이빨과 머리, 등뼈, 갈비뼈, 꼬리뼈 들이, 종종 내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경이였다. 충격이었다.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에도 가보고, 다른 몇몇 자연사 박물관에도 가보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놀라움, 수천만 년 전의 과거가 2013년 현재의 내 눈앞에 벼락처럼 다가와 앉은 듯한 생생한 현실감은 미처 맛보지 못했다. 



공룡들, 그리고 매머드의 거대한 몸뚱이, 코믹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큰 상아 등은, 절대적 카리스마를 풍기면서도, 역설적으로 왜 그들이 멸종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온 몸으로, 아니 온 뼈들로 보여주는 듯했다. 도저히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생존 가능한 신체 구조가 아니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기량은 좋지만 정신적으로는 설익은 조각가가 그저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자랑할 목적으로 신체의 몇몇 부위를 과장하고 부풀려 만든 충격 요법적 조각상들에 가까웠다고 할까? 공룡들은, 실제 환경에 적응해 생존하기에는 너무나 버겁고 비효율적인, 겉으로 보기에만 그럴듯하고 인상적일 뿐인 비현실적 망상처럼 여겨졌다. 그들의 몸이, 뼈가, 임박한 죽음의 운명을 스스로 예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검치호랑이 (Saber-toothed tiger)들의 공격을 받는 맘모스의 모습을 형상화한 위 전시품은, 공룡이나 맘모스 같은 거대 동물들은 운석의 지구 충돌이나 빙하기가 없었다고 해도 장기적으로는 생존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해주었다. 물론 검치 호랑이는 맘모스보다는 훨씬 더 날래고 주위 환경에 더 기민하게 대처했으리라고 여겨지지만 기형적인 신체 구조 (특히 지나치게 긴 이빨)로 대표되는 설계상의 근본적 결함은 맘모스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공룡이나 맘모스는, 혹시 신의 설익은 실험용은 아니었을까? 




시간 조절에 실패해 점심을 건너뛴 채 3시간 가까이 달려 에드먼튼까지 왔다. 초콜렛 바, 사탕, 물 따위로 점심을 때웠다.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했던 성준이는 저녁으로 '우동 곱빼기'(Big Sized Woodong Noodle Soup)를 먹겠다고 노래를 불렀다. 아내의 절친이 에드먼튼의 몇 안되는 일식집 중 '사부 스시'라는 곳을 골랐다 (위).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 척박한 에드먼튼에도 썩 괜찮은 일식집이 있구나, 하는 때늦은 발견이기도 했다. 한국 사람들이 하는 사부 스시의 음식은 푸짐하고도 맛깔스러웠다. 나는 나가사키 짬뽕을 시켰는데, 담백하면서도 매콤한 국물 맛이 일품이었다. 



성준이도 마침내 '꿈'을 이뤘다. 일식집 종업원에게 부탁해 특별히 큰 그릇에 우동을 내오도록 했다. 흡족해 하는 성준이의 표정에, 우리도 흡족했고 행복했다. 고단하고 빡빡했지만 퍽이나 재미있고 인상적인 여행이었다. 혹시 알버타로 관광가는 사람이 있다면 꼭, 꼭 가보시라 권하고 싶은 박물관도 하나 알아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