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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 올슨의 스릴러 'Silenced'

'필론의 추리소설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크리스티나 올슨 (Kristina Ohlsson)의 신작 스릴러 'Silenced'를 읽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새삼 '추리 소설에 관한 한 북유럽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헤닝 만켈, 스티그 라슨, 조 네스보,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유씨 애들러-올슨, 라스 케플러, 앤 홀트, 레이프 GW 페르손, 헬렌 투르스텐, 카밀라 락버그, 카린 포섬... 이건 뭐...


이번 소설을 통해 처음 알게 된 크리스티나 올슨도 대단하다. '조 네스보와 더불어 놓쳐선 안될 작가'라는 책 표지의 광고 문구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올슨의 글은 -  영어 번역이 원본에 충실했다는 가정에서 - 차분하고 지적이다. 작가의 성격이 치밀하고 꼼꼼하고 명철할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다 읽고 나서, 전작 'Unwanted'부터 읽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사건 자체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별 상관이 없겠지만 주인공들의 개인사에도 관심을 기울인다면 약간 맥이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줄거리: 소설은 현재 시점으로부터 15년 전에 벌어진 한 비극적 에피소드를 프롤로그처럼 깔아놓는다. 일년중 낮이 가장 긴 하지 전날, 집 근처 들판에서 꽃을 꺾던 한 십대 소녀가 괴한으로부터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아 끝내 비밀로 남은 그 사건이 소설의 사건 전체를 규정하는 한 키워드가 될 수 있다는 작가의 신호다. 


시점은 현재로 돌아온다. 한 중동계 남자가 뺑소니 사고로 - 그런 것처럼 보이는 - 죽는다. 하지만 그의 신분을 알 수 있는 증거는 현장에 남아 있지 않다. 행여나 실종 신고가 들어오지 않을까 기다리지만 그것도 감감무소식이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60대 교회 사제와 그 아내가 머리에 총을 맞고 죽는다. 경찰은 사인을 동반자살로 잠정 결론 짓는다. 주인공 프레드리카 버그만(Fredrika Bergman)은 알렉스 렉트 (Alex Recht)가 이끄는 연방 특별 수사팀과 함께 수사를 진행한다. 알렉스는 만삭인 프레드리카의 상황을 고려해 단순한 뺑소니 사고처럼 보이는 교통사고 건을 맡기고, 자신과 페더(Peder), 조어(Joar) 세 수사관은 동반자살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두 사건은 그러나 수사가 진행될수록 겉보기와는 다른 여러 의문과 문제점을 안고 있고, 서로 연관된 문제일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교회 사제인 제이콥 알빈은 생전에 스웨덴 불법 입국자들을 도와주는 일에 열성이었고, 그 때문에 일과 가정 양쪽에서 여러 갈등을 빚었다는 점이 밝혀진다. 또 전적으로 인도적인 차원의 도움에 열중한 그와 달리, 주변에는 돈과 금품을 노린 '인신 밀수' 네트워크도 암약해 왔다는 단서가 포착된다. 


한편 프레드리카 일행의 수사 내용과는 별도로, 태국 방콕에 모종의 임무를 띠고 잠입한 한 스웨덴 여성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나중에야 그 이름과 신원이 밝혀지는 이 여성은 어느날 갑자기 신원 도용의 피해자가 되어 하루 아침에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방콕 주재 스웨덴 대사관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대량의 마약 소지 혐의로 수사 중인 경찰에 자수하라고 권유한다. 이 여성은 방콕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경찰이 점점 더 수사망을 좁혀가는 가운데 '인신 밀수' 네트워크의 어두운 정체가 드러나고, 피살 당한 교회 사제와 그를 둘러싼 지인들 간의 복잡하고 비극적인 관계도 베일을 벗는다. 그리고 그 모든 비극의 씨앗은 1980년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왜 소설이 데이지 꽃을 꺾던 10대 소녀의 비극적인 에피소드로 시작했는지 알려준다 (이 소설의 원제는 '데이지 꽃'이다).


크리스티나 올슨. 출처: http://www.mysterytribune.com


독후감: 이 소설을 읽어가는 일은 마치 퍼즐을 짜맞추는 일 같다. 서로 전혀 무관해 보이는 여러 사건들을 병렬적으로 배치한 뒤, 실은 그 사건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올슨의 이야기 직조 방식은 더없이 치밀하고 그럴듯하다. 불법 이민자와 난민들이 사회 문제로 부각되는 북유럽, 특히 스웨덴의 상황을, 처음에는 평화롭고 따뜻하기만 했으나 어느 한 순간의 사소하지만 특별한 계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일로에 놓이게 되는 두 가족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절묘하게 엮었다. 거시적인 사회 문제와 미시적인 가족 문제를 적절히 버무림으로써, 작가는 이를 소설의 반전 도구로까지 활용할 수 있었다. 


또 사건의 진실을 캐는 과정에만 눈길을 주지 않고 수사관들의 사생활을 적재적소에 끼워넣어, 주인공들에 대한 독자의 감정 이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점도 주목할 만하다. 무려 25세 연상에다 유부남인 남자의 아기를 임신한 프레드리카, 크루아상을 놓고 성적인 농담 한 마디 던졌다가 곤경에 처하는 페더, 그와 적대적 관계에 놓이는 파견 수사관 조어, 아내를 끔찍히 사랑하지만 그런 아내의 진실을 알지 못해 괴로워하는 알렉스 등의 이야기는 수사 내용과는 별도로 또 다른 흥미와 호기심을 자아내는 단편들이다.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주인공 에를렌두르처럼, 이들 수사관은 더없이 인간적이다. 특히 알렉스와 아내의 마지막 여정을 보여주는 에필로그는 눈물을 자아낼 정도로 곡진하고 슬프고 안타깝고 아름답다.


작가 크리스티나 올슨은 소설가로서는 아직 신인급이지만 그간의 경력은 화려하면서도 흥미롭다. 올슨은 정치학자로 얼마 전까지 유럽안보협력기구 (OSCE)에서 '반테러 담당관'(Counter-Terrorism Officer)으로 일했다. 스웨덴안보국, 외무부, 스웨덴국립국방대학 등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런 약력을 보면 왜 글이 그처럼 차분하고 꼼꼼하고 치밀하다고 여겨졌는지 납득이 간다. 소설 별점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