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기

스티븐 킹의 '조이랜드'

해마다 여름철이면 북미 서점가는 이른바 ‘해변 독서용’, ‘피서 독서용’ 책들로 넘쳐난다. 대체로 이야기의 충격 효과는 높지만 품질이나 완성도는 떨어지는, 실제로는 일회성으로 끝나고 말 수준이지만 대형 출판사들의 과대 포장과 밀어부치기식 마케팅으로 많이 팔리는 그런 책들이다. 납량특집 호러 드라마나 영화와 동궤에 있는 책들이라고 보면 맞겠다 (개인적으로는 이맘때면 꼭 나오는 제임스 패터슨(과 누구 공저, 실제로는 그 ‘누구’가 대부분의 내용을 썼고, 패터슨은 유명세와 마켓 파워를 빌려줬을 것으로 추정한다)의 책들이 제일 꼴보기 싫다. 안 읽으면 그만이지, 해도 정말 역겨운 뒷맛은 어쩔 수가 없다).


스티븐 킹의 ‘조이랜드’는 처음부터 ‘해변 독서용’, 혹은 ‘피서 독서용’을 자임한 책처럼 보인다. 짧은 초록색 원피스 차림에 커다란 카메라를 든 붉은 머리의 매혹적인 미녀가 무엇인가에 크게 놀란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모습의 표지는 ‘펄프 픽션’의 느낌을 주려 일부러 그렇게 꾸민 것 같다그렇다면 내용도 그처럼 ‘펄프스러운’, 적당한 대목에서 공포스런 내용이 우연이나 필연을 가장해 툭툭 튀어나오는 싸구려 ‘해변 독서용’일까?

답은 ‘아니다’이다. 앞에 ‘결코’라는 부사를 더해도 되겠다. 과연 스티븐 킹이다. 명불허전 – 이야기의 장인임을 다시금 명백하게 확인시키는 한편 웃음과 눈물, 감동까지 안겨주는 명품 소설이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개그콘서트의 한 대목을 흉내낸다면 킹은 실로 “요오물! 나(독자)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는 요오물!”이다.

소설 조이랜드는 주인공 데브 존스가 아직 대학생이던 1973년의 여름, 노쓰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놀이공원 ‘조이랜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겪은 경험담이 뼈대다. 그가 조이랜드에서 일을 시작한 시점은 2년간 눈먼 사랑을 했던 여자로부터 실연을 당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조이랜드에서 새로운 동료를 만나고, 같은 대학생 친구들을 사귀고, 수수께끼와 같은 일을 겪고, 오래 전에 살해당한 여자의 귀신 이야기를 듣고, 운명과도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위기에까지 놓이는 데브의 경험담은, 그 다채롭고 극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격정적이거나 스피디하지 않다. 도리어 담담하고 잔잔하고 차분하다. 화자인 데브가 이제 예순이 넘어 회고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야기가 지루하거나 너무 느리다는 느낌을 주지 않을까 싶은데,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다. 데브와 그 주변의 이야기가 도리어 더 충실하고 깊게 그려지는 것이다. 사실은 위 표지의 여자도 데브처럼 여름 한 철 조이랜드에서 일하는 여대생들 중 미인들을 뽑아 저런 복장으로 놀이공원을 돌면서 사진을 찍어주는 '할리우드 걸'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내용과 잘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조이랜드'는 위 사진의 디즈니랜드나 '식스 플래그스' (Six Flags) 같은 초대형 첨단 시설은 아니다. 하지만 나름 규모가 있고, 여름철에는 제법 많은 사람을 끌어모으는 장소로 묘사된다. 조이랜드의 설립자이자 사장이 모든 것을 미리 연출하고 기획하는 디즈니의 상술을 비판하고 폄하하는 장면도 나온다.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감명 받은 것은 이야기의 재미도 재미지만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킹의 문장이었다. 앞에서 킹에 대해 ‘이야기의 장인’이니 ‘요물’이니 다소 호들갑을 떨었는데, 그 이유는 이 소설 ‘조이랜드’에서 유독 그의 문장이 생동하는 리듬감을 보여준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야기 전개에서 군더더기가 느껴지지 않았고, 표현하는 상황에 맞춰 문장에 슬쩍슬쩍 추임새를 넣어 그 상황의 현실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었다. 그 중에서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데브가 조이랜드의 마스코트 개인 ‘하위 더 해피 하운드’ (Howie the Happy Hound)의 옷과 탈을 쓰고, 놀이공원 데이케어에 맡겨진 대여섯 살박이 아이들과 함께 ‘호키 포키’(Hokey Pokey) 송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이다.

‘You put your right foot in / you take your right foot out / you put your right foot in / and you shake it all about / you do the hokey pokey…’ 이런 식으로 나오는 노랫말을 킹은 소설 속에 절묘하게 녹여넣어 하위의 탈을 쓴 데브의 움직임을 더없이 유쾌하고 코믹하면서도 생동감 넘치게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I put my left foot in; I put my left foot out; I put my left foot in and I shook it all about. I did the Hokey Pokey and I turned myself around, because - as almost every little kid in America knows - that's what it's all about.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곳곳에서 탄성을 질렀다. 와… 정말 잘 쓴다, 어떻게 이렇게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갈 수 있을까! 게다가 놀이공원 기구들과 담당자들이 쓰는 특유의 용어(jargon)도 지극히 자연스럽게 소설 속에 녹아들었다. 정말 독자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구나... 문득, ‘스티븐 킹이 죽으면 이 빼어나기 그지없는 이야기 솜씨도 함께 사라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킹이 1999년에 큰 교통사고로 죽을 뻔한 적이 있고, 이미 나이가 일흔이 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킹이 앞으로도 부지런히 좋은 책을 가능한 한 많이 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작용했을 것이다.

결론 삼아 말한다면, 조이랜드는 무늬만 ‘해변 독서용’이지, 실제로는 언제 읽어도 깊은 재미와 감동을 맛볼 수 있는 고품격 소설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놀이공원에서 보낸 여름 한 철을 소재로 삼아, 어른으로 성숙해가는 주인공의 내면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엽기 호러적 상황이 킹의 전매특허 같은 소재지만, 조이랜드에는 그런 내용이 거의 들어 있지 않다. 초자연적이라 할 만한 상황이 나오기는 하지만 비중이 크지 않고 (내용 전개에는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지만), 이야기의 전체 얼개와 워낙 잘 맞아 떨어져서,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라는 반문은 고개조차 쳐들지 못한다.

여름에 소설 한 권 읽고 싶으시다고? 그렇다면 스티븐 킹의 ‘조이랜드’를 읽어보시라! 정말 강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