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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코넬리의 '블랙박스'

20년이다. 마이클 코넬리의 열혈 민완 형사 '해리 보쉬'(Harry Bosch) 시리즈가 나온 지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래도 보쉬는 여전히 건재하고, 그의 불타는 정의감과 사명감은 20년 전과 다를 바가 없다. 그의 최신간 '블랙박스'는 그 20년의 세월을 가로지른다. 연결한다. 


줄거리

LA폭동이 터져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 1992년, LAPD의 강력계 형사인 해리 보쉬는 피살자의 제보들을 좇아 시체들과 그 주변 정황을 급히 훑는 임무를 맡았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마당이어서 어느 한 사건만을 꼽아 심층 수사를 벌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보쉬는 피살 현장을 급히 훑어 그것이 폭동으로 말미암은 단순 피살 사건인지, 아니면 폭동의 혼란과 어수선함을 악용해 벌인 용의주도한 살인 사건인지 분별해야 했다. 


네덜란드 출신의 프리랜서 사진가인 아네케 제스퍼슨은 그런 상황에서 만난 피살자였다. 근거리에서 처형된 듯한 피살자를 보고 보쉬는 계획된 살인임을 직감한다. 총알이 날아간 지점을 추정해 탄피를 찾아내지만 그 사건만을 전담해 수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곤 20년이 흘렀다. LAPD는 폭동 20주년을 맞아 언론에 뭔가 그럴듯한 성과를 내놓고 싶어하고, 그래서 폭동 당시 벌어진 여러 미제 피살 사건에 주목한다. 보쉬는 제스퍼슨 사건을 다시 맡기로 한다. 하지만 정작 LAPD의 수뇌부는 보쉬의 수사를 탐탁치 않아 하면서 뒤로 미루라는 압력을 넣는다. 이유는 제스퍼슨이 백인 여성이라는 점. 아직 흑백 갈등의 불씨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피살된 백인 여성의 범인을 잡았다고 발표할 경우 흑인 진영에서 또다시 흑백 차별론을 내세우며 시비를 걸 수 있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보쉬가 누군가. 정치적 계산이나 술수, 사내 정치, 직장 상사의 같잖은 시비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이 길이다 싶으면 앞뒤 안가리고 돌진하는 열혈 형사 아닌가. 보쉬는 수뇌부와 새로 부임한 '책상물림' 부서장의 다리 걸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카로운 추리력과 앞뒤 안가리는 뚝심, 한 번 단서를 잡으면 낮이든 밤이든 파고드는 집중력으로 차근차근 사건의 핵심에 접근해 간다.


보쉬의 수사에 가장 큰 동력을 제공한 것은 '블랙박스'였다. 비행기가 추락하면 거기에 들어 있는 블랙박스를 수거해 추락 원인을 분석하듯, 미제 사건을 다시 수사할 때 가장 먼저 찾아봐야 할 것은 당시 수사 기록과 증거물을 모두 모아놓은 박스('블랙박스')다. 제스퍼슨 사건이 일어난 곳은 보쉬의 관할 지역 밖이었고, 당시 폭동이 끝난 뒤에 관할 수사관들은 그 사건을 나름 꼼꼼하게 추적하고 수사하고 여러 주변 인물과 용의자들을 인터뷰해 비교적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사건은 끝내 해결되지 않았고, 범인도 잡히지 않았다.


보쉬는 그 블랙박스에 나온 인물들을 다시 찾아나서는 것으로 수사를 시작하고, 얼마 안있어 탄피의 탄도 궤적과 일치하는 베레타 권총을 찾아낸다. 권총의 식별 번호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웠지만 20년새 발전한 첨단 수사 과학은 그조차 다시 재생해낸다. 문제는 그 권총의 진원지가 미국이 아닌 이라크였다는 것. 보쉬는 그로부터 과거 이라크전 ('사막의 폭풍' 작전을 기억하시는가?)에 참전했던 전직 군인들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추정을 하게 된다. 


독후감

이번에도 마이클 코넬리는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코넬리의 보쉬를 20년 이상 장수하게 해준 비결이다. 보쉬를 내세운 소설치고 독자를 실망시킨 것은 없었다. 온갖 인종의 도가니, 살인 사건이 유독 많은 LA를 배경으로, 코넬리는 보쉬를 앞세워 온갖 살인 사건들을 보여주었다. 보쉬의 수사 과정을 통해 현대 미국 사회의 병리 현상을 집약적으로 잘 묘사하는 것은 물론, 경찰의 수사 기법과 추리 과정을 흥미롭게 설명하는 가운데, 경찰 내부의 복잡다단한 정치학, 정치인들과 경찰, 시민들 간의 역학 관계도 자연스럽게 드러냈고, 보쉬의 개인사를 통해 그의 인간적 면모를 꼼꼼하게 구축했다. 그렇게 단단하고 일관되게 축조된 보쉬라는 캐릭터는 2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끄떡없이 살아남아 수많은 독자들을 울고 웃게 만들었다. 


블랙박스는 보쉬의 20주년 특별선물처럼 여겨진다. 나이는 들었지만 그의 남다른 사명감과 정의감은 여전히 펄펄 끓는다. 베트남 전에서 귀환한 후, 생존의 수단으로 택한 것이 형사직이었지만 형사가 되어 사건을 수사하는 그의 태도와 원칙은 단순한 출세나 생존이 아니라 불의를 처단하고 정의를 바로세우는 것이었다. 보쉬가 딸 매디와 나누는, 왜 경찰이 됐는가에 대한 대화는 보쉬라는 인물의 핵심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블랙박스가 수작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걸었던 기대에 견주면 다소 평이하다는 느낌도 지우기 어렵다. 막판에 벌어질 법한 충격적 반전도 이번에는 없다. 정공법으로는 길이 없어 편법으로 - 아니, 엄밀히 따지면 불법으로 - 사건에 접근하는 보쉬의 행동도, 시각에 따라서는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 ★★★☆


아래 비디오는 마이클 코넬리가 직접 신작 '블랙박스'를 소개하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