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기

마음이 따뜻해지는 청소년 소설 'Where Things Come Back'

존 코리 웨일리의 소설 <Where Things Come Back>은 내게 '세렌디피티'(serendipity)였다. 말 그대로 '뜻밖의 재미'와 '전혀 예기치 못한 기쁨'을 안겨준 사랑스러운 소설이었다. 


이런 독후감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수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올해 마이클 L. 프린츠 청소년 문학상과, 우수 데뷔작에 주는 윌리엄 C. 모리스 청소년 문학상 양쪽의 수상작으로 뽑혔다. 둘 모두 전미도서관협회(ALA)에서 주는 상이고, 따라서 명실상부한 우수작이자 우량서로 공인 받은 셈이다. 


이 소설에 대한 각계의 평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표현은 '놀랍다' '특이하다' '독특하다' '가슴아프다' '감동적이다' '코믹하다' '따뜻하다' 같은 것들이다. 내 감상 또한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묘하다 싶을 정도의 이야기와 괴짜스러운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렇다고 그 이야기와 인물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 주변을 찬찬히 둘러본다면 이해될 법도 한 대목이다. 늘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고 여겨 온 친구나 친척, 심지어 부모나 자식을 가만히 보면 종종 저렇게 기묘하고 특별한 면이 있었구나 문득 놀라게 될 때가 있지 않은가. 이 소설은 그렇게, 평범한, 혹은 평범한 것처럼 보이는, 일상 속에서 비상하고 기발하며 괴짜스러운 면모를 발견하는 놀라움과 충격을 선사한다. 


소설은 주인공 컬른 위터의 1인칭 시점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다른 지역 동년배들인 벤튼 세이지와 캐봇 시어시의 기묘하고 기구한 삶의 굴곡이 3인칭 시점으로 컬른의 이야기와 장을 바꿔 가며 번갈아 나오다가, 후반으로 가면서 전혀 동떨어진 듯했던 두 삶이, 마치 강물이 합쳐지듯 한 줄기로 수렴되면서 충격적인 반전을 불러온다. 


하지만 그 반전이 이 소설의 핵심은 아니다. 재미의 핵심도 아니다. 핵심은 미국 아칸소 주의 주도인 리틀 록에서도 한참 떨어진 인구 몇천 명의 시골 '릴리'(Lily)에서 벌어지는, 아니 아무 특별하거나 흥미롭거나 흥분할 만한 일도 벌어지지 않는, 그런데도 이상하게 독자의 흥미를 계속 잡아끄는, 일상적 재미에 있다. 고등학생인 컬른, 그보다 한 살 아래지만 쌍둥이라고 착각할 만큼 닮은 수재 동생 가브리엘, 그리고 그 둘의 절친인 루카스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지만, 영영 사라진 줄 알았던 초대형 딱따구리인 '라자루스 딱따구리'의 예기치 못한 귀환 (혹은 귀환했다는 소문)에 연일 흥분하는 동네 사람들도 소설의 이야기 구조에서 중요한 기둥 구실을 한다. 라자루스 딱따구리는 우리가 만화 영화를 통해 잘 아는 '우디 우드페커' - '필리에이티드 우드페커(도가머리 딱따구리) -보다도 덩치가 훨씬 더 큰 희귀종이다. 


지은이 존 코리 웨일리. 아직 학생 티가 나는 동안이다. 미국 각지에서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전업 작가로 돌아섰다.

컬른은 모범생이지만 대학에 갈지 말지, 동네를 떠날지 말지, 뚜렷한 목표도 꿈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별 생각없이 보내는 평범한 10대다. 예쁜 여자와의 데이트를 꿈꾸고, 가끔 실제 데이트에 나가기도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가령 속으로 짝사랑하는 에이다 테일러는 사귀는 남자마다 죽거나 자살하거나 다쳐서 저주 받은 여인으로 불리는데, 자기한테는 도무지 관심조차 보이지 않아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


그러던 어느날 마약에 절어 살던 사촌 오슬로가 죽고, 자기보다 훨씬 더 비상하고 늘 행복해 보이기만 했던 동생 가브리엘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면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듯하던 컬른의 일상은 돌연 물구나무를 선다. 동생의 종적은 찾을 길이 없고, 컬른과 루카스, 가족은 물론 온 동네가 그의 실종에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때마침 떠오른 '라자루스 딱따구리' 때문에 정작 가브리엘의 행방을 좇는 일은 자꾸 뒤로 밀린다. 동네 신문은 몇날 며칠 딱따구리 얘기뿐이다. 내가 그 놈의 딱따구리를 본다면 죽여버릴거야, 라고 컬른이 씩씩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동네 사람들과 마주치는 게 즐거운 일도 아니다. 워낙 작은 동네다 보니 모두가 모두를 알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르트를 하는 컬른을 보는 사람마다 동생 일은 정말 안됐노라고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을 건네는데, 그게 여간 피곤하고 괴로운 일이 아니다. 동생의 실종 기간이 한 주 두 주 늘어나면서 그가 죽었을 거라는 관측은 점점 더 확고한 사실처럼 변해간다.


소설 제목은 이 작은 가상의 마을에 대해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인구가 몇천 명밖에 안되는 동네의 젊은이들은 무엇을 꿈꾸는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탈출'이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이 지긋지긋하고 지루하고 촌스럽기 짝이 없는 동네, 확 떠버린다, 라는 꿈. 열망. 그러나 정작 '탈출'에 성공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일단 떠나기는 하지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혹은 좌절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 또한 적지 않은 까닭이다. '모든 것들(Things)이 돌아오는 곳'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그와 연결된다. 영영 멸종된 줄 알았던 라자루스 딱따구리, 연기처럼 증발된 가브리엘, 컬른과 그의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소설의 줄거리만 놓고 보면 심심하고 맨숭맨숭할 것 같다. 그런데 그 심심하고 맨숭맨숭한 일상과 사건을 풀어가는 작가의 유머러스하면서도 다소 냉소적인 시선이 여간 흥미롭지 않다. 그 안에 따뜻한 애정이 느껴져서 더욱 더 그렇다. 슬프고 가슴 아픈 사연도 마찬가지. 이들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내 주변의 삶, 내 주변의 대화처럼 친근하고 익숙하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은 뒤 다시 두세 페이지 앞으로 가서 끝까지 읽기를 두어 번 되풀이했다. 그만큼 소설이 끝나는 게 아쉬웠기 때문이다. 따뜻하고 행복한 결말인데도 아쉬웠다. 친한 친구, 200여 페이지 동안 살갑게 사귄 벗을 멀리 떠나보내는 것 같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존 코리 웨일리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대된다. 별 다섯에 다섯. 어디 이런 소설 또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