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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팩트'조차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비겁한 한국 언론

신입 기자 시절엔 이상하고 어색했다. '팩트'(fact)라는 말이 마치 밥 속에 들어간 작은 돌처럼 마음 속에서 버석거렸다. 왜 '사실'이라고 안하고 '팩트'라고 하지? 더 멋있게 들려서? 기자들만의 직업적 언어(jargon)인가? 그러면서도 한 해 두 해 가면서 '사실'이라는 말보다 '팩트'를 더 애용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잘 모른다. 하지만 기자들이 저 말을 애용하고 사랑한다는 사실은 잘 안다. 기자는 오직 '팩트'를 전달해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말이 쉽다. 실천은 어렵다. 세상이 엄혹하고 체제가 살벌한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요즘 언론을 보면 그런 사회 상황이나 엄혹한 현실을 핑계로 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조건에서도 '팩트'를 비튼다. 혹은 숨긴다. 그리고 기자들은 그렇게 숨긴 팩트 뒤에 안주한다. 딱하다. 너절한 찌질이가 따로 없다. 최근의 두 보도를 보고 그런 판단이 더욱 확고해졌다. 


사례 1. 중앙일보 칼럼 '지나치게 싼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인용 (2013년 1월24일치)


'요새 출판동네에서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 급의 기발함(!)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출판사가 있다. 영화 흥행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레 미제라블』을 낸 A출판사다. A출판사의 『레 미제라블』은 ‘○○대 불문학과 교수가 수 년간 공들인 완역’을 내세우지도 않았는데 한때 인터넷 서점 판매 순위 1위에 올랐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격경쟁력 덕분이다. B사의 5권짜리 『레 미제라블』 세트는 인터넷 서점에서 정가 6만1000원에서 10% 할인된 5만4900원에 판다. C사의 것은 4만4800원이다. 반면에 A사의 책은 한글판 5권과 영문판 5권 도합 10권짜리 세트가 정가 7만9000원에서 50% 할인된 3만9500원이다. 권당 4000원이 채 안 되는 셈이다.'


레미제라블 붐을 타고 얄팍한 상혼으로 출판계를 어지럽히는 '더티플레이'에 대한 중앙일보 칼럼이다. 읽으면서 핏대가 확 올랐다. 도대체 왜 출판사 이름을 밝히지 않는거냐? 출판사 쪽에서 소송이라도 걸까봐? 


몇 번이나 얘기하지만 출판사 이름은 개인정보도, 기밀도 결코 아니다 (이 맥락에서는 OO대도 분명히 그 이름을 밝혀야 마땅하고, 심지어 그 교수 이름까지 밝혀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온라인 서점들에 뻔히 진열되어 값까지 다 나와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책값이나 날림 번역도 다른 번역서와의 비교를 통해 금방 밝힐 수 있는 '팩트' 아닌가! (좀더 정확한 방법은 원본과 비교하는 것이겠지만) ... 기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읊어대는 그 '팩트'조차 ABC나 ㄱㄴㄷ 속에 숨기는 이유는 뭔가? 비겁하고 누추하다. 기자의 무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그 기자가 딱하다.


참고로 위 A출판사는 더클래식, B출판사는 민음사, C사는 펭귄 클래식 코리아다. 예스24든 교보든 아무 서점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금방 확인된다 (아래 그림은 예스24에서 캡처한 것. 출판사 A, B, C의 정체가 금방 드러난다). 왜 이렇게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너절한 보도가 관행처럼 굳어졌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사례 2. 경향신문 기사 '‘박근혜 위인전’… 父박정희 찬양, 유신 옹호' 인용 (2012년 12월28일치 보도)


'세 권의 책은 모두 박[정희] 전 대통령을 경제 성장을 이끈 지도자로만 묘사했다. 


ㄱ출판사가 대선 직후 낸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대통령 박근혜 이야기>에는 “아버지(박 전 대통령)는 경제 성장에 온 힘을 쏟았다. 가난을 뿌리 뽑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으며 국민들에게 어떻게든 일할 기회를 만들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써 있다. 


ㄴ출판사가 지난 9월에 낸 <박근혜, 부드러운 힘으로 세상의 변화를 꿈꾸다>에는 “밥 먹을 때도 온통 나라 이야기뿐이었다. 병들고 굶주린 국민들을 떠올릴 때마다 대통령이셨던 아버지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셨다”고 썼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페이스북에 단 촌평초등생들을 대상으로 한 박근혜 위인전이 벌써 세 권이나 나왔다는 경향신문 기사. 처음에는 그런 내용 자체에 기막혀 하며 기사를 읽어가다가, 출판사 이름을 ㄱ사 ㄴ사로 익명 처리한 데 더 기가 막혔다. 도대체 요즘 언론에선 기자의 기본 소양 교육도 안 시키나? 도대체 왜 출판사 이름을 익명 처리해야 하는가? 프라이버시? 명예 훼손? 하핫 참!


거기에 달렸던 댓글들: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기자의 배려?

...ㅂ씨 위인전이라고 하지, 왜...? ㅎㅎㅎ

...어이가 없네요

...오늘 어느 언론은 한국에서 여성 대통령 나온 것을 미국이 부러워한다는, 그야말로 확인되지 않은 보도를 냈더군요...바람보다 빨리 눕는 곡필 언론의 박비어천가가 이미 본격화한 듯한 느낌입니다.

...얼마전 직장에서 한 부장님이 '박근혜 일기'라는 책을 다 읽으신 후 저에게 권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멱살 잡아드릴뻔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