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키친하우스 (The Kitchen House)
지은이: 캐슬린 그리솜 (Kathleen Grissom)
출간일: 2010년 2월2일
출판사: 터치스톤 (사이먼앤슈스터의 계열 출판사 중 하나)
종이책 분량: 384페이지
줄거리
『The Kitchen
House』는 1791~1810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미국 버지니아 주 남부의 농장 생활상을 그린다 (남북전쟁은 그로부터 50년쯤 뒤인 1861년에 시작됐다).
일곱살바기 소녀 라비니아 매카튼 (Lavinia McCarten)은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오는 배 안에서 부모를 모두 잃고 오빠마저 다른 노예상에게 팔리면서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되어 그 배의 선장인 제임스 파이크(이하 ‘캡틴’)를 따라 버지니아 주의 담배 농장 ‘톨 오크스’(Tall Oaks)로 오게 된다. 라비니아는 갑작스레 닥친 재난에 큰 충격을 받아 배 안에서 벌어진 기억을 잃고 한동안 말조차 못하지만 그녀를 맡아 기르게 된 ‘키친 하우스’ 흑인 노예들의 사랑 어린 보살핌으로 점차 정상을 찾아가게 된다.
키친 하우스는 ‘빅 하우스’(Big House)에 거주하는 농장주 캡틴과 그 가족의 음식을 전담하는 부엌 별채이다. 모두를 너그럽게 감싸면서 부엌의 단란한 분위기를 이끄는 마마 메이(Mama Mae), 역시 넉넉한 마음씨와 연륜으로 요리 외의 잡무를 총괄하는 파파 조지(Papa George),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벤, 쌍둥이 딸 패니(Fanny)와 비티(Beattie), 그리고 캡틴의 숨겨진 딸 벨(Belle)이 키친 하우스의 가족이다. 이들은 라비니아를 ‘아비니아’, 혹은 ‘비니’라고 부르며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특히 벨은 라비니아의 엄마 노릇을 톡톡히 하고, 같은 또래인 패니와 비티는 라비니아를 친자매처럼 대한다. 라비니아도 이들에게 깊은 사랑과 친밀감을 느끼고, 흰 피부색에도 불구하고 흑인 노예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농장주인 ‘빅 하우스’의 캡틴은 자주 집을 비운다. 윌리암스버그에 있는 자신의 배와 다른 자산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부재 중 농장을 관리하는 일은 랜킨에게 맡겨지는데 그는 말할 수 없이 사악하고 잔인한 인물이다. 노예들에게 배급되는 음식을 중간에 착복하는가 하면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구타나 고문, 강간도 서슴지 않는다. 빅 하우스의 살림은 캡틴의 부인인 ‘미스 마사’(Miss Martha)의 몫이지만 잦은 유산과 사고, 질병 등으로 여러 차례 자식을 잃어 삶에 대한 희망을 거의 잃어버리고 아편에 의지해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고향인 필라델피아를 그리워하며 농장 일에는 아무런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미스 마사는 우연히 만나게 된 라비니아를 어린 나이에 죽은 자신의 여동생 이사벨로 착각하고 자신의 곁으로 자주 불러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라비니아에 대한 미스 마사의 의존증은 라비니아 또래의 딸 샐리를 그네 사고로 잃고 – 샐리의 오빠인 마셜이 사고의 주범이었다 – 뒤늦게 낳은 어린 아들 캠벨마저 필라델피아를 휩쓴 황열병에 희생되면서 더욱 깊어진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마셜은 처음에는 정상적인 소년이었지만 지독한 인종 차별주의자에 사악하기 그지없는 워터스가 그의 가정 교사로 들어오면서 서서히 변해간다. 워터스는 랜킨과 자주 어울리고 마셜도 여기에 휩쓸리면서 흑인 노예들에 대한 그의 증오와 경멸감, 편견도 점점 더 깊어진다.
흑인 노예들을 늘 친절하고 공정하게 대했던 캡틴이 황열병의 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키친 하우스에는 또 한번 변화의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미스 마사는 온갖 비극으로 점철된 빅 하우스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여동생인 미스 새라와 그 남편이자 변호사인 미스터 매든이 있는 윌리암스버그로 거처를 옮긴다. 미스 마사의 의지가 되었던 라비니아도 따라가게 된다. 키친 하우스 사람들에게 깊은 애착과 가족애를 느껴 온 라비니아로서는 내키지 않는 변화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윌리암스버그에서의 생활은 라비니아에게 더없이 행복한 순간이었다. 미스 새라의 딸인 메그와 친자매 같은 우정을 맺게 되는 한편, 메그의 가정교사로부터 정식 교육을 받아 하루가 다르게 교양과 지식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스 새라와 미스터 매든도 라비니아를 친자식처럼 대한다. 한편 인근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던 마셜과도 자주 만나면서 그의 친절한 면모를 발견하고 차츰 애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라비니아는 – 아니, 라비니아만 – 마셜의 진면목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랜킨과 공모해 벨을 겁간하고 아이를 배게 한 사실이나 그들이 농장의 노예들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라비니아는 전혀 무지하다. 마셜과 결혼하기 전까지, 라비니아는 마치 거품 속에 싸인 것처럼 외부의 현실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무지하고 안이하다. 정신질환자 같은 마셜의 실체와 그의 만행을 알게 됐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렸다. 마셜과 결혼해 톨 오크스 농장에서 키친 하우스의 식구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라비니아의 꿈은 산산이 깨어지고, 키친 하우스의 식구들에게도 끔찍한 비극이 벌어지면서 소설은 긴박한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감상 및 해설
『The Kitchen
House』의 이야기 전개 방식은 독특하다.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 라비니아와 벨의 시각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장치는 소설의 역동성과 깊이를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라비니아는 세상을 따뜻하고 순수하게만 바라볼 뿐, 그 뒤에 도사린 현실의 팍팍함이나 사악함은 감지하지 못한다. 그에 비해 캡틴의 숨겨진 딸이면서도 노예 신세를 면치 못하는 벨의 시각은 현실적이고 때때로 비극적이다. 벤과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 캡틴 때문에 겪는 심적 고뇌, 캡틴이 아버지임을 알면서도 누구에게도 이를 알릴 수 없는 비극, 흑인 노예들의 고통이 벨의 장에서는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라비니아의 세계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라비니아는 자신이 키친 하우스의 흑인 노예들과 같은 처지라고 믿고, 그들의 세계에 동화되고 싶어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엄연히 백인이다. 캡틴의 죽음으로 농장을 물려받게 된 마셜과 결혼해 농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제 수평 관계가 아니라 주종 관계다. 그런 관계의 질적 변화와 마셜의 실체를 잘 이해하는 키친 하우스 식구들은 라비니아를 주인으로 섬기려 하지만 라비니아는 계속 메이와 조지를 ‘마마’, ‘파파’라고 부르며 가족처럼 지내려 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마셜로부터 더욱 핍박을 받고 다른 데로 팔아버리겠다는 협박에 시달리는 것은 라비니아가 아니라 메이와 조지를 비롯한 키친 하우스의 노예들이다.
『The Kitchen House』는 흑인 노예제를 소재로 한 일련의 인기 소설들, 이를테면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 앨리스 워커의 『컬러 퍼플』, 캐스린 스토킷의 『헬프』 등을 연상시킨다. 흑인 노예들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고, 주요 등장 인물들의 개성도 잘 드러나 있다. 키친 하우스의 흑인 노예들과 교감하면서, 또 빅 하우스의 주인 가족을 관찰하거나 그들과 소통하면서 점점 더 성숙해 가는 라비니아의 모습을 묘사한 소설의 전반부는 훈훈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성장 소설로 읽힌다.
문제는 후반부다. 전반부까지 감정을 이입해 가면서 응원을 보냈던 그 라비니아는 마셜과 결혼하는 순간 실종돼 버린다. 그 동안 착실히 쌓아온 교육과 교양, 독립심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의아할 정도다. 당시의 시대 상황이 여성의 절대적 순종을 강요했다고 치더라도, 라비니아가 사악하고 잔인한 폭력 남편 마셜에게 보이는 무기력증과 순종주의, 열패감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 부조리한 현실에 어떻게든 맞서려고 하기보다 미스 마사처럼 아편 중독으로 스스로를 몰아가는 파괴적 행태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보호하려 희생도 마다 않는 키친 하우스의 가족 아닌 가족을 돌보려 하기보다 매사를 자기만의 이기심과 아집에 끌려 결정하는 바람에 도리어 다른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라비니아의 거듭된 실책 앞에서, 그녀에 대한 전반부의 동정심과 애정을 계속 유지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더욱이 후반부의 사건 전개는 전반부에 견주어 밀도가 떨어질 뿐 아니라 억지스러운 대목이 많다. 서둘러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하려는 무리수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악마 같은 인물 랜킨은 그렇다 치더라도, 선한 인물의 가능성을 종종 내비치곤 했던 마셜의 성격이 지극히 단선적으로 처리된 것, 등장 인물들을 흑과 백, 선과 악으로, 마치 칼로 무 베듯 이분화한 점은 소설의 깊이를 훼손하는 부분이다. 마셜에게 거듭 겁간 당해 그의 자식을 몇 명이나 낳는 비티와의 화해 장면도 2차원적 작위성을 면치 못한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라비니아와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당대의 시대상이 전혀 묘사되지 않아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아쉬움이다. 이 소설만 봐서는 미국 독립전쟁과, 이후 터지게 되는 남북전쟁의 맥락을 찾아낼 수가 없다. 당대 미국 사회의 문제와 갈등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총평
『The Kitchen
House』는 무엇보다 재미있다. 속도감 넘치는 전개가 독자의 주의와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어당긴다. 주요 등장 인물들의 개성도 잘 드러나 있고, 빅 하우스의 주인과 키친 하우스의 흑인 노예들 간의 미묘한 관계, 그들의 생활상도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흑인 노예들의 대화는 특유의 사투리와 비문법적 표현을 잘 살려 한층 더 강렬한 현실감을 부여한다. 그러나 후반부에 가서 이야기의 밀도가 떨어지고 여러 사건사고가 한국의 이른바 ‘막장 드라마’를 연상케 할 만큼 얽히고 설키는 몰윤리적 양상으로 발전한다는 점, 동어 반복이 많다는 점, 결말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안이하게, 서둘러 마무리된다는 아쉬움도 지적해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he Kitchen House』 는 변화무쌍한 플롯으로 독자의 관심을 끝까지 붙잡는 ‘이야기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내러티브의 힘 하나만으로도 『The Kitchen House』는 충분히 화제를 모을 만하다.『The Kitchen House』가 2010년 출간된 뒤 2년 가까이 묻혀 있다가 돌연 인기를 끌게 된 배경 중 하나도 바로 그 ‘이야기의 힘’이었다. 미국의 여러 독서클럽을 통해 차츰차츰 입 소문이 났고 마침내 2012년의 화제작으로 극적인 부활에 성공한 것이다. 별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