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빛들은 수평선에 내려앉았다.
수평선은 눈동자 속의 선이고 물 위의 선이 아니라는 것이 물가에서는 믿기지 않았다. 시야의 끝에서 물과 하늘이 닿는 허상이 펼쳐졌으나, 닿아 있는 자리에서 물과 하늘 사이는 비어
있어서 수평선은 아무런 선도 아니었고 그 너머에 또 다른 수평선이 지나갔다."
김훈의 소설 <黑山> (학고재)을 읽었다. 한국에 한 달 남짓 다녀 온 후배 편에 구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김훈’이라는 이름을 보고 부탁했다.
김훈은 글쓰기와 글읽기에 관한 한 나의 우상이다.
김훈에게 빠져든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다.시골 집에서 아버지가 한국일보 지국을 했는데,지국이라지만 새벽마다 트럭이 집앞 길가에 던져놓고 가는 신문 한 더미가 전부였다.동네도 크지 않았지만,한국일보 독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그 신문에서 내가 가장 탐독한 것은 김훈 기자의 문화면 글이었다.소설이나 평론,시에 대한 그의 평은 남달랐다.당시 표준으로 여겨지던 신문기자의 객관적 글이 아니었다.형용사나 부사 같은 꾸밈말을 자제하고 가능한 한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기사의 통념을,김훈은 한국일보의 문화면에서 깨부쉈다.지금 생각하면 김훈의 그런 파격과 일탈을 받아주고 안아준 한국일보 편집국도 퍽이나 깨어 있었던 셈이지만,나는 김훈의 그런‘튀는’글들에서 짜릿한 충격과 감동을 맛보았다.물론 기사의 표준 문법을 알아서 그랬던 것도,그런 문법을 깨뜨린 글이라는 것을 이해해서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유장하게 중첩하면서 아름답게 이어지는 그의 문장은 실로 굉장했다. 그런 문장을 가능케 하는 그의 다차원적 시선, 무불통지의 인문학적 지식이 놀라웠다. 그가 박래부와 진행한 문학기행은 또 어땠는가.
김훈의 문체는 이미 전설이 되었다.한국 신문과 잡지의 문화부 기자치고 김훈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고 할 만큼 그의 문체는 독특했고,유려했고,깊었고,혁명적이었다. 지금 저마다 필명을 떨치고 있는 고종석,남재일,임순만,최재봉 같은 이들의 문체도 그 상당 부분을 김훈에게 빚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김훈을 나는 시사저널에서 직접 만났고,사회부장, 편집국장으로 모시는 경험을 했다.그를 만난 지 얼마 안돼서,나는 그의 책을 쭈뼛뿌뼛 내밀었다. 내가 읽고 고이 간직했던 <문학기행> <내가 읽은 책과 세상> <풍경과 상처> 같은 책들이었다. 그로서는 낯설거나 드문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개 道伴’이라고 써주었다.함께 도를 닦는 벗,혹은 함께 길을 가는 벗이라는 뜻일 것이다.
시사저널에 기사를 쓰면서 이리저리 핀잔도 듣고 충고도 들었다.그 중에 몇몇 기억나는 말은“상현아,네 기사에 어디‘환’이 있냐?애환은 슬픔과 기쁨이라는 뜻이잖아.슬픔밖에 없으니 환은 들어가면 안되지” (나는 안이하게 애환=슬픔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 놈 나쁜 놈이라고 쓰면 그건 기사가 아냐.기사는 팩트로 말해야지.독자가 글을 다 읽고,이 놈 나쁜 놈이네,하고 말하게 만드는 게 기사야”같은 것들이다. 그밖에도 많지만 여기에 옮기기는 부적절하기도 하고, 내 기억도 더없이 짧다.
그의 언행은 글과 달리 더없이 어수룩하고 심지어 실없기도 하고 그래서 더 호감을 느끼게 했다.그는 술자리에서 종종 여성 차별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나는 한 번도 그것이 진심이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그 술자리에서 부적절한 발언이었다고 여긴 적도 없다.그와 몇 달을 지내다 보면 그만의 말투,세상에 대한 시선,글과 달리 종종 아무렇게나 나오는 말들에 익숙해지게 되고,따라서 설령 그가 정치적/사회적으로 부적절한 말을 던져도 그것이 김훈의 실제 신념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저 허허 웃어 넘기게 된다.바로 그렇기 때문에,나는 그 뒤에 터진 한겨레21사태의 전말에 깊이 분개했었다.그가 좌담회에서 한 여성차별적 발언을,실상 누구보다도 김훈의 성격과 스타일을 잘 아는 한겨레21의 여기자가 이슈로 삼았고,그 바람대로 이슈가 됐다.더 기막힌 것은,역시 누구보다도 김훈을 잘 알 게 분명한–알았어야 할–시사저널 기자들이 마치 사회투사라도 되는 양 길길이 날뛰면서 그를 내쳤다. (내친 뒤에,시사저널의 몇몇 기자들의 그의 이름을 이용하고자,그 뒤에 몇 차례 다시 모시려 했다.잔인하고 부박한 인간들이다.)김훈이<칼의 노래>서문과 이 책<黑山>후기에 계속해서“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말하는 배경에는 그런 에피소드도 한몫 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김훈의 글에 심취했다가, 그의 인간적 면모에 실망했다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내 주변 기자 선후배들이 그랬다. 그러나 나는 김훈의 글이 가진 그 장려한 세계와, 장점뿐 아니라 결점 또한 필연적으로 노출할 수밖에 없는 인간적 면모를 나란히 견주는 것은, 그 출발점부터 잘못되었다고 믿는다. 나는 그래서 여전히, 김훈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술을 잘 마실 줄 모르는 데다 머리가 둔해서 그와 자주 지지고 볶을 기회를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각별한 선후배 사이로까지 발전하지 못했지만, 아니 아마도 그래서 그럴까?
<黑山>은 그 제목만큼이나 어둡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제목은 중의적이다. 정약전이 유배된 흑산도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절망과 고통, 격절을 상징한다.
원양으로 가는 배들에게 흑산은 마지막 섬이었고, 하얀 바다와 잇닿은 검은 바다의 섬이었다. 흑산의 검을 흑黑 자가 단 한 개의 무서운 글자로 이 세상을 격절시키고 있었다. 섬에 처음
들어왔을 때, 정약전은 그렇게 느꼈다. 백성의 피를 빨고 기름을 짜고
뼈를 바수고 살점을 바르고 껍질을 벗기는 풍습은 육지나 대처와 다르지 않았으나 태어나서 품 팔아서 먹고 또 죽는 방식은 달랐다. 박민剝民의 제도와 방식이 같다 하더라도 섬은 아득히 멀어서 간여할 자가 없었고 물과 바람에 얽힌 사슬을 풀어낼 수가 없었다.
정약전은 흑산의 검을 흑 자가 무서웠으나, 무서움은 섬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흑 자의 무서움은 당대 전체에 대한 무서움과 같았다. 정약전은 그 무서움의 안쪽을
스스로 들여다보았는데,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의 흔적이 거기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듯도 했다.
나는
처음 제목을 봤을 때 김훈 선배가 무협 소설을 쓰셨나? 했다. 김훈의
부친이 당대의 인기 무협소설가 아니었나. 그 정도로, 후배에게 이 책을
사다 달라고 부탁할 때까지도 책의 내용에 무지했다. 웹을 뒤지면 금방 나올텐데 그럴 생각을 못했다.
그냥 읽어보자는 생각이었다.
김훈의 책을 누가 평한들 내 성에 차지는 않을 거라는 예단도 있었다.물론 김훈의 문체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중언부언에 만연체,과장된 비장함이 넘치는 고어체…그것도 틀린 지적은 아닐 것이다.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김훈의 문체는,컴퓨터 자판으로는 절대로,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문체라는 것.그처럼 유장하게 흐르면서 중첩하고 휘돌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두겹 세겹 감싸는 문장은,모든 것을 즉자적이고 스타카토 식으로 몰아대는 키보드 작업으로는 불가능하다.원고지에 꾹꾹 눌러쓰고,썼다가는 지우개로 지워 다시 쓰고, 머리를 쥐어 뜯으며 다시 생각을 정리하고, 거기에 새로운 생각을 잇고 붙이는, 피나는 '육필'작업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는 문장이다.컴퓨터를 이용한 글쓰기와,원고지 위에 한 자 한 자 손으로 글씨를 채워넣어 문장을 완성하는 글쓰기가 얼마나 다른지는,웬만큼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누구나 공감할 대목이다.
<黑山>은 훗날 ‘신유박해’,또는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알려진 기독교 탄압 사건을 소설화한 것이다.네이버 백과사전에 보면 이런 설명이 나온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서교(西敎)를 엄금,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이 박해로 이승훈,이가환,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100명이 처형되고 약400명이 유배되었다.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이 설명은 그러나 더없이 공허하다. 우리가 제도 교육에서 배운 역사 아닌 역사, ‘사람’의 피와 살이 빠지고 오직 권력을 쥔 자,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자의 시각에서 본 거칠기 짝이 없는 요약일 뿐이다. 사람을 뺀 통계와 분석만이 있을 뿐, 거기에 탄압 받는 이, 죄없이 피 흘리는 이, 무고하게 맞는 이, 부당하게 죽임을 당하는 이, 뼈 빠지게 일하고도 굶어죽는 이, 늘 빼앗기고 짓밟히고 당하는 이는 들어 있지 않다.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 언제나 억압 받으며 신음해 온 ‘민중’, 혹은 ‘백성’의 이야기는 들어 있지 않다. 우리가 수없는 사화와 반정, 아무개의 난을 수업 시간에 들으면서도 아무런 감흥을 – 교훈은 고사하고 – 느끼지 못한 데는 그런 이유도 끼어 있을 것이다.
<黑山>은 그 탄압 받는 이, 죄없이 피 흘리는 이, 무고하게 맞는 이, 부당하게 죽임을
당하는 이, 뼈 빠지게 일하고도 굶어죽는 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죄없는 – 어쩌면, 힘 없고, 반항할 줄 모른 게 죄였을까? – 백성들이 갖은 방법으로 수탈되고 고통 받는 '박민剝民'의 장면은,
김훈의 짐짓 담담한 문체 때문에 더욱 소름끼치게 실감된다.
흑산도로 유배간 정약전과, 그의 조카사위이자 조선 천주교회 지도자인 황사영이 자주 등장하지만 이들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니다. 주인공은 문풍세, 마노리, 조풍헌, 박차돌, 육손이, 창대, 장팔수, 아리, 강사녀, 순매, 길갈녀 등 그들과 씨줄과 날줄처럼,
혹은 가깝게, 혹은 멀게 맞물리고 연결되는 수많은 백성들이다. 부패한 정권에 끊임없이 괴롭힘
당하면서, 그저 인간이 인간답게 대접 받는 세상을 꿈꾸는 백성들이다. 신유박해의 칼날 아래 죽어간 백성들에게, 천주교의 교리는 그런 꿈과 희망일 뿐이었다.
<黑山>의 전개와 결말은 예측 가능하다. 그 시대적 배경이 신유박해 때임을 알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黑山>을 무슨 범죄 소설이나 액션물로 생각하고 다가간 독자라면 십중팔구
실망할 것이다. 어쩌면 다 읽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내게 <黑山>은 인간 탐구였다.
역사상 거의 언제나 부조리했던 사회, 그 부정과 부패가 유독 더 심했던 한 사회에
대한 단면도였다. 죽이고 탄압하는 자의 시각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고
탄압 받는 처지에 놓인 자의 시각으로 본 사회. <黑山>은 그런 사회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대접 받는 세상을 꿈꾸다 비명에 간 수많은 백성들에 대한 헌사였다.
<黑山>은 그래서 웬만한 범죄 소설보다 더 끔찍하고 괴로운 풍경을 안겨주기도 했다.마치 내가 그런 형벌을 당한 듯 몸이 움찔할 정도였다.가령 이런 대목이다.
"서울에서 의금부 형틀에 묶여서 심문을 받을 때 곤장 삼십 대 중에서 마지막 몇 대가 엉치뼈를 때렸다.그 때,캄캄하게 뒤집히는 고통이 척추를 따라서 뇌 속으로 치받쳤다.고통은 벼락처럼 몸에 꽂혔고,다시 벼락쳤다.이 세상과 돌이킬 수 없는 작별로 돌아서는 고통이었다.모든 말의 길과 생각의 길이 거기서 끊어졌다.고통은 뒤집히고 또 뒤집히면서 닥쳐왔다.정약전은 육신으로 태어나 생명을 저주했지만 고통은 맹렬히도 생명을 증거하고 있었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통증은 삭신으로 퍼졌다.매를 맞을 때,고통은 번개와 같았고 매를 맞고 나면 고통은 늪과 같았다.”
그리고 이런 대목.
“빈대가 피를 빨았고,피를 빨린 사람이 빈대를 잡아먹었다.통통한 빈대를 이빨로 깨물면 탁 소리가 났다.빈대 속에서 사람의 피가 터졌다.”
한편,가장 낮은 곳에서 바라본 백성의 삶은 지극히 순박하고 아름답기도 했다.단순하기 그지 없는 삶의 양상에도 얼마나 깊고 먼 진리가 숨어 있는지를<黑山>은 차분하게 그려 주었다.그리고 정약전과 창대의 대화를 통해,아무리 고통스럽고 격절된 삶을 살지라도 끝내 버릴 수 없는 것이 희망임을,소망임을 보여주었다.
-나는 흑산을 자산玆山으로 바꾸어 살려 한다. - 같은 뜻일 터인데... - 같지 않다. 자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흑은
너무 캄캄하다. 자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이다. - 바꾸시는 뜻을 모르겠습니다. - 혹은 무섭다. 흑산은 여기가 유배지라는 걸 끊임없이 깨우친다. 자玆 속에는 희미하지만 빛이 있다. 여기를 향해서 다가오는 빛이다. 그렇게 느껴진다. 이 바다의 물고기는 모두 자산의 물고기다. 나는 그렇게 여긴다. - 그쪽이 편안하시겠습니까? 창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김훈의 글이 어렵다는 사람들이 있다.혹은 글이 너무 길거나 중언부언이어서 짜증난다는 사람들도 있다.그럴 수도 있다.누구나 호오의 취향은 있는 법이니까.그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설득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은 더더욱 없다.다만 나는 김훈의 글이 다른 어떤 문사의 글보다 더 좋다.아니,글이라기보다는‘문체’라고 해야겠다.그는 문체 하나만으로도 오래오래 기억될 작가다.
<黑山>이 그의 작품 가운데 얼마나 높은 자리를 차지할지는 알 수 없다.그러나 나는 그의 다른 어떤 작품에도 뒤처지지 않는 걸작이라고 생각한다.무엇보다 한두 영웅을 내세우는 대신 힘없는 백성 여럿을 오늘에 되살려 조선의 한 역사적 사건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낸 성취는 실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절두산을 몇 번 지나치면서도 특별한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하지만<黑山>을 읽고난 지금,절두산이며 배론성지가 안겨주는 감정의 무게,역사의 압박은 더없이 크다.
<黑山>은 또 다른 면에서도 내게 작은 감명을 안겼다. 바로 뒤에 붙은 연보와 용어 해설이다. 한국의 출판계에서 참 인색하거나 부실하다고 여겨지는 대목이 바로 출처 밝히기와 색인, 용어 해설 같은 참고 자료다. <黑山> 말미의 연보를 읽으면서, 저 불우하고 비참했던 시대의 숱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기근, 장마, 지진, 해일, 거기에 그보다 더 무서운 패악 정권 밑에서, 실로 헤아릴 수 없는 백성들이 죽어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