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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섹스 카운티' 3부작 - 캐나다, 캐나다인의 본질 절묘하게 담아

오랜만에 만화 소설(graphic novel)을 두 권 읽었다. 모두 제프 르미어 (Jeff Lemire)라는 캐나다 작가의 작품. 하나는 H.G. 웰즈의 <투명인간>을 비튼 듯한 <The Nobody>이고, 다른 하나는 <에섹스 카운티>(Essex County) 3부작이다. 캐나다 출판계의 소식을 전하는 독보적인 잡지 '퀼앤콰이어'(Quill & Quire)를 통해 작가와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됐고, 특히 <에섹스 카운티>는 캐나다의 공영 방송 CBC가 해마다 가장 추천할 만한 캐나다산 작품들을 놓고 경연을 벌이는 '캐나다 리즈'(Canada Reads) 프로그램에 2011년 최종 5권 중 하나로 뽑혔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맨 아래, 그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의 책을 소개하는 지은이의 비디오를 달아 놓았다). 


The Nobody, 그리고 에섹스 카운티 3부작. 둘다 도서관에서 빌려봤다.

The Nobody: 표지 그림(위 왼쪽)에서 금방 연상되듯이 이 만화 소설은 H.G. 웰즈의 <투명인간>에서 그 아이디어를 얻었다. 인구가 불과 몇백 명인 시골 '라지 마우스'(Large Mouth)에,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붕대로 칭칭 싸맨 사내가 들어온다. 주민들은 그의 독특하다기보다는 수상하고 섬뜩한 외모에 놀라고, 그의 출신과 정체를 궁금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존재에 익숙해진다. 아니, 거의 여관 밖에 나오지 않는 그의 의식적 은신 덕택에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잊어버린다. 하지만 개중에는 늘 남보다 더 호기심이 많고, 의심이 많고, 궁금한 것은 꼭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게다가 살인 사건이 터진다. 사람들은 당연히 붕대 감은 사나이를 의심하고 그의 정체를 밝히려 한다. 



에섹스 카운티 3부작: 내가 정말로 감동 받은 것은 바로 이 책이다. 그 중에서도 평생에 걸친 두 형제의 우애와 갈등, 아이스하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제2부 '유령 이야기' (Ghost Stories)였다. 3부는 본래 세 권에 걸쳐 따로 따로 출간되었다가 나중에 한 권으로 더해졌다. 그러면서 뒤에 몇 가지 짤막한 외전을 붙였고, '에섹스 카운티'를 쓰기까지의 사연도 더했다. 



독후감: 캐나다만의 이야기를 이처럼 간결하면서도 단순하게, 감동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물론 내 독서량이, 특히 캐나다산 작품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한 탓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 소설이 내게 준 감동은 꽤나 크고 깊었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시골, 토론토에서 남서 쪽으로 4시간쯤 달려가야 나오는 마을 '에섹스 카운티'를 통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곡절 많은 드라마를 통해, 작가 제프 르미어는 캐나다 근현대사의 한 측면을 절묘하게 의인화했다. 


루가 도시에서의 삶에 대해 고백하는 장면. "The city doesn’t become part of you...you become part of it. It soaks you up bit by bit, year after year. Until you’re just another tiny part of of its system..."


춥고 척박한 캐나다 동토에서의 삶이 거칠거칠하면서도 더없이 단순한 선을 통해 잘 표현되었고, 아이스하키를 직접 하거나 프로 경기를 시청하는 것으로 영일이 없는 캐나다인 특유의 생활 방식도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에 녹아 들어갔다. 웬델 클라크, 팀 호튼, 매츠 선딘 등 귀 익은 하키 선수들 이름이 나오고, 캐나다인들이 겨울이면 빠지지 않고 시청한다는 CBC의 주말 프로그램 '하키나잇 인 캐나다'(Hockey Night in Canada)도 종종 등장한다. 내게는 특히,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 사람들로 붐비는 대도시 토론토에 대한 거부감, 그러면서도 결국 부정할 수 없고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복잡한 감정이 표현된 '유령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았다. 


아이스하키가 왜 캐나다인들에게 그토록 깊이 각인되었는지를, <에섹스 카운티>는 캐나다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풍자가인 스티븐 리콕 (Stephen Leacock)의 말을 빌려 우리에게 전한다. 그것은 결국 엄혹한 추위 속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캐나다 사람들의 역사와 곧바로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Hockey captures the essence of Canadian experience in the New World. In a land so inescapably and inhospitably cold, hockey is the chance of life, and an affirmation that despite the deathly chill of winter we are alive.


만화(cartoon)와 구별해 만화 소설 (graphic novel)이라고 부를 만큼, 이 분야의 양적, 질적 성장은 눈부시다. 억지로 '만화 소설'이라고 번역했지만 '만화'라는 단어를 달리 바꾸지 않는 한, 영어의 'graphic novel'이라는 단어가 주는 남다른 무게감과,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진지한 태도를, 그 번역어에서 느끼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어쨌든 <에섹스 카운티>는 굳이 장황한 텍스트의 소설이 아니더라도,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선과 그에 부합하는 몇 마디 텍스트만으로도 독자들에게 웬만한 소설 못지 않은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왜 'Graphic novel'이 번듯한 장르로 북미 시장에서 제대로 대접받는지를 보여주었다. 별점은 다섯에 다섯. 아래 비디오는 제프 르미어가 <에섹스 카운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