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온 책 중에서 아마도 가장 큰 화제와 관심을 모은 책.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 내로라 하는 주요 언론이 이 책에 관해 대서 특필했고, 시사주간지 타임은 이 책과 책에 담긴 내용을 커버 스토리로 다루기까지 했다 (‘The Upside Of Being An Introvert (And Why Extroverts Are Overrated)’ 내성적인 사람의 장점 (왜 외향적인 사람들은 과대 포장되었나)).
나는 종이 책을 먼저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채 몇 페이지 보지 못하고 돌려주고 말았다. 자주 그렇듯이 감당 못할 분량을 한꺼번에 빌리는 바람에, 하드커버에 어두컴컴한 표지, 두꺼운 분량에 먼저 주눅들어 다음에 다음에 하다가 대출 기간을 탕진하고 만 것이었다.
그 다음에 오디오북을 빌렸다. 무려 9장의 CD로 구성된 무삭제판. (물론 그보다 더 많은 CD로 구성된 오디오북도 많다. 저스틴 크로닌의 묵시록적 SF 소설 <The Passage>는 요약본인데도 12장이고, 스티브 잡스의 무삭제판 자서전은 무려 20장의 CD로 구성되어 있다. CD 포맷은 서서히 사양길에 접어들고 오버드라이브를 통한 다운로드 형식이 점점 더 늘고 있지만 그래도 CD형 오디오북은 아직 주류의 지위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CD로 직접 듣는 것은 아니고 mp3 파일로 일일이 리핑한 다음 아이팟으로 듣는다.)
출퇴근 버스 안에서, 점심 시간 산보길에 틈틈이 듣기 시작했다. 곧장 그 내용에 빠져들었고, 점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걷거나 버스를 기다리느라 서 있을 때만 듣던 것이 버스 안에 앉아서도 종이책을 꺼내드는 대신 계속 귀를 쫑긋 세우고 오디오북을 듣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렇구나! 그렇지! 아하! 하고 소리내어 맞장구를 치고 싶은 대목이 수도 없이 나왔다. 새로운 배움, 새로운 시각, 새로운 통찰이 내 머리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느낌이었다. 책을 읽어주는 케이데 메이저의 나긋나긋하고 선명하면서도 더없이 차분한 목소리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책의 성격이나 주제와 더없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도서관에서 일껏 빌려 읽고 나서도, 혹은 오디오북으로 듣고 나서도, 아예 사야겠다라고 결심하게 만드는 책은 별로 많지 않다. 설령 사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도 값비싼 하드커버보다는 페이퍼백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라고 생각하기 일쑤다. (그 뒤에 잊어버리고 사지 않게 되는 경우도 물론 많다.)
이 책은 예외였다. 어제 아마존 캐나다를 통해 하드커버 판을 주문했다. 무엇보다 내가 책으로 다시 꼼꼼히 읽어보고 싶었고, 그에 못지않게, 아내더러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었다. 오디오북으로 듣는 동안에도 여러 차례 “이건 당신이 꼭 봐야 할 책”이라고 말해 주었다. 스스로도 내성적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아내는 나보다 더 내성적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묘사하는 내성적인 사람의 특성과 강점, 미덕들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두 아이, 특히 지나치다 싶게 민감하고 내성적인 둘째 생각도 많이 났다.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이 책 <Quiet>를 쓴 수전 케인 (사진) 자신이 지독히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끔찍히 싫어하고, 사람들 모인 파티나 캠핑에 가기보다는 집안에 혼자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를 훨씬 더 선호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미국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 말 안하고 조용히 있으면 덜 떨어진 사람이나 바보, 소극적이고 부끄러움 잘 타는 반사회적 (antisocial) 인물, 더 나아가 ‘루저’로 여기는 사회 아닌가. 말이 되든 안되든, 졸가리가 있든 없든 씩씩하게 (좀더 정확하게는 개념없이) 손 들고 일어나서 발표하는 사람, 앞에 나서서 대체로 앞뒤 안가리고 “가자!”라고 외치는 사람, 말끔한 옷차림과 외모에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자신의 우월성을 표나게 내세우는 사람을 성공한 사람으로, 리더로 여기는 사회 아닌가.
외향성을 표나게 우대하고 내성적인 성향을 자신없음, 무능력, 실패 등과 동일시하는 미국 사회의 특성은 데일 카네기, 노먼 빈센트 필, 토니 로빈스, 오프라 윈프리 같은 인물을 떠올리면 더욱 명징한 그림을 보여준다. 내성적인 사람들이 그 같은 외향성 우대 사회에서 살아남는 길 중 하나는 ‘척하는’ 것이다. 외향적인 척. 혹은 외향적인 성격을 피나는 노력을 통해 배양하는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 수전 케인이 바로 그랬다. 자신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길을 골라, 하버드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 협상가가 된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케인은 어느 모로 보나 사람들 대하는 데 능숙하고, 자신감에 넘치고,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열띤 논쟁도 서슴지 않는 인물일 것 같다. 하지만 그와 정반대라고 케인은 고백한다. 말하기보다는 듣는 게 더 좋고, 책 읽기와 글 쓰기를 사랑하며, 대규모 그룹보다는 친밀한 소규모 그룹과 진지하게 토론하는 것을 즐긴다. (낮고 부드럽게)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는 습성이고, 어쩌다 많은 사람 앞에서 연설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늘 긴장과 두려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한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도 자신의 그런 성격이, 자신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수백만 명이, 사회에서 그 진가를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그에 따르면 미국 사회만 해도 3명 중 1명이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말로 표출해야만 인정해 주는 왜곡된 사회 문화적 코드가 ‘목소리 큰 사람 = 리더’라는 왜곡된 인식을 고착화 했고, 그 때문에 복잡한 사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제대로 된 해법을 내놓을 수 있는 내성적인 사람들은 그 뒤로 밀리거나 소외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감성도 거기에 길들여져 있다. 리더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 크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하자고 나서는 사람이라고 상상한다. 말쑥한 복장과 세련된 외모, 단상을 장악하고 멋지게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CEO.
그렇다면 그런 자신감 넘치는 달변가, 리더가 부지기수인 미국 사회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경제 난국을 맞았을까? 그런 리더를 CEO로 발탁했던 수많은 기업들이 왜 쇠퇴나 몰락의 길을 걸었을까? 분명히 그들의 자신감이나 발표 능력, 지휘 능력이 부족해서는 아닐 것이다.
수전 케인에 따르면 내성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은 각자 나름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아는 내용이라고 몰아부칠 수도 있지만, 다시 한 번 찬찬히, 우리가, 특히 서구 사회에서는 외향적인 사람이 월등히 우대받고 인정 받아 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내성적인 사람은 사교성에 문제가 있고, 어린 시절에 뭔가 트라우마가 있었을 것이며, 사회에서 성공하기 어렵겠다라는 인식을 준다는 사회적 통념도 기억하자.
외향적인 사람은 대체로 매력적이고 사교적이다. 어느 모임에 가든 주목 받고, 친구를 만든다. 모임을 역동적으로 만들고 분위기를 띠운다. 뭔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다. 하지만 이들은 대체로 생각보다 말이, 행동이 앞서는 부류다. 해결해야 할 문제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기보다는 일단 판을 벌여놓고 보자는 주의다. 조립해야 할 레고 블록이나 퍼즐이 있으면 설계도를 먼저 살피거나 전체적인 구도와 조립 계획을 머리 속에 그리기보다는 일단 이리저리 맞춰보자는 접근법이다. 사안이 단순하고 해법이 명료한 경우에는 외향적인 리더가 더없이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다. 기업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도 그만이다. 하지만 문제가 복잡해지면 사정은 180도 달라진다.
내성적인 사람의 장점은 여기에서 발휘된다. 이들은 행동보다 생각이 앞서는 부류다. 먼저 주어진 사안이나 문제점을 꼼꼼히 살핀다. 어떤 주제로 토론을 벌일 때도 앞뒤 안재고 손을 번쩍 들기보다는, 무슨 말을 어떻게 내놓을지 머리 속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주어진 사안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그러면서도 자신감에 넘치는 외향적 성격의 발표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저건 이 문제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얘기잖아! 문제를 먼저 이해해야지!’ 하지만 내성적인 사람들의 이런 접근법은, 종종 둔하거나 머리 회전이 느려서 그런 것, 부끄러움을 타거나 발표하기를 두려워 해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라고 오해받는다. 그리고 이들이 자신의 정리된 생각을 이야기하려고 할 때쯤이면 이미 토론은 막장이거나, 다른 주제로 넘어가 버렸기 일쑤다.
케인은 내성적인(introvert) 성격을 수줍음 타는 (shy) 성격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런 오해는 내성적인 사람을 지도자 감이 아니라고 보는 편견의 한 발원지이기도 하다. 조용한 카리스마, 조용한 지도자의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마하트마 간디,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렇고, 이 책이 소개한 로자 파크스가 그렇다. 파크스는 백인과 흑인의 자리를 구분한 앨러배마 주 몽고메리 시내버스의 정책에 저항해 미국 인권 운동에 불을 지핀 인물이다.
내성적인 사람(introvert)와 외향적인 사람(extrovert)은 그러나 칼로 무 자르듯 양단되지 않는다. 그 사이에 무수한 스펙트럼이 있다. 둘 사이에 어정쩡하게 걸쳐 있는 'ambivert'도 있다. 더욱이 내성적이면서도 사회 생활의 필요에 의해 외향적인 척하거나, 스스로의 맹렬한 학습과 노력으로 외향성의 외피를 성공적으로 걸친 내성적인 사람도 매우 많다. 중요한 것은 둘 사이의 균형을 회복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먼저 교육의 위험한 획일주의를 바꿔야 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교실의 일반적인 풍경은 교사가 가르치고 학생들은 교사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구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둥근 탁자를 중심으로 죽 마주보고 앉은 구도다. 학생들끼리 서로 토론하고 한 팀으로서 협력하라는 메시지다. 좋다. 문제는 모든 과목에서 그 같은 협업 (collaboration)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수학이나 과학 문제를 풀 때 필요한 것은 각자의 깊은 사고다. 소리내어 떠드는 게 아니라 자기 속으로 침잠해서 문제와 맞서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일을 서로 토론하고 합의해서 해답을 도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런 토론 구도는 대체로 내성적인 성격의 사람들에게 불리하다. 그들의 능력을 제대로 표출하기가 힘들다.
<Quiet>는 일일이 인용하거나 소개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연구 사례, 실제 인물들의 경험담, 유명 석학들의 조언들로 가득하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어봐야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수전 케인이 이 책을 쓰기까지 7년이 걸렸다고 한다. 수많은 관련 문헌을 뒤지고, 이 분야의 주요 연구자들을 인터뷰하고, 사례가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고, 자료를 정리하고, 글을 쓰고, 다듬고 하는 데 소요된 시간이다. 그야말로 ‘노작’ (勞作)이다. 오디오북으로 들으면서도 어떻게 이처럼 내용이 꼼꼼하고 치밀할 수 있을까 자주 놀라고 감탄했다. 이렇게 공들인 필생의 역작조차 내 돈 주고 안 사준다면 도대체 어떤 책을 산단 말인가? 별점은 꼭꼭 채운 다섯 개 만점. 이 같은 노작을 내놓은 수전 케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싶다. 아래 비디오는 수전 케인의 TED 연설. 퍽 흥미롭다.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