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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받지 못한 편지들...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받지 못한 편지는 슬프다. 그 앞에, 운명의 '1950년'이 붙으면 그 슬픔은 배가된다. 그 뒤 3년 동안, 아니 62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과 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한국 사람이면 다 아는 까닭이다. 게다가 '조선인민군'의 우편함이라니...! 이 편지들은 예외 없이, 보낸 이들과 받았어야 할 이들 사이 어딘가에서, 영영 길을 잃고 말았을 것임을 예감케 한다.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삼인)는 한국전쟁이 막 시작될 즈음의 어지러운 사회 상황 속에서 그렇게 영영 길을 잃고 만 편지 113통의 사연을 담은 책이다. 그 중 68통은 편집자 이흥환* 씨가 꼼꼼하게 해독하고 해설까지 곁들여 일반 독자도 쉽게 읽고 전후 정황을 파악할 수 있게 배려했고, 나머지 45통은 설명없이 실제 편지를 고스란히 스캔해 독자들이 직접 편지의 내용을 읽어 보도록 했다. 누렇게 변색된 편지 위에, 각양 각색의 필체로 펼쳐진 구구절절한 사연으로부터, 송신인의 마음자락을 헤아려 보시라는 배려이자 요청이기도 하다. 


전쟁의 아픔, 동족상잔의 비극, 남북 분단, 이산가족, 끝나지 않은 전쟁...숱하게 들었고, 읽었고, 심지어 우리 스스로 한두 번씩은 읊었을 그 표현들에서,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감정의 흔적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모든 감정과 가치와, 심지어 의미까지 표백되어 버린, 그저 허언에 불과할 따름이다. 정치적 구호, 당대 위정자들의 위선적 핑계일 뿐이다. 저런 표현을 말하는 자도, 그것을 듣는 자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는 그 잃어버린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아픔을, 왜 한국전쟁이 비극이었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인지를, 가장 투박한 언어로, 가장 솔직하고 가식없는 말로, 오늘 다시 상기시킨다. 인민군대에 간 남편에게 곧 면회를 가겠다는 아내의 편지에서, 독자는 남북 갈등,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없었다면 저런 편지의 존재 이유 자체가 없었을 것이라고, 그 남편과 아내는 서로의 안위에 대한 근심 없이 평화롭고 다복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저절로 한숨 짓게 된다. 밤낮 없이 폭격이 쏟아지는 와중에서 아직 살아 있다는 편지를 읽으면서, 과연 이 사람은 끝내 살아 남았을까, 이 편지를 받았어야 할 사람은 또 무사했을까, 저절로 마음이 다급해지면서, 이 몹쓸 놈의 전쟁!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어떻게든 아이들 죽이지 말고 잘 키워달라고, 살아만 있어 달라고 아내에게 당부하는 편지에서는 눈물이 핑 돈다. 전쟁이 났을 때 가장 불쌍한 것은 힘없는 양민, 특히 아녀자와 아이들이라는 시쳇말이 절로 떠오른다. 도대체 이 따위 전쟁이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새삼 되묻게 된다. 결혼 날짜 받아놨으니 속히 집으로 오라고 아들을 호출한 아버지의 편지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은 계속되는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곧 터질 대참화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보통 사람들의 심사가 새삼 안타까워진다. 



이들은 그 뒤에 어떻게 됐을까? 전쟁이 끝난 뒤 어떻게든 재회해서, 내가 그 때 보낸 편지 잘 받았느냐, 살아 있었구나! 서로 얼싸안으며 생존의 기쁨을 만끽했을까? 아니면 이 편지들처럼 영영 서로를 잃어버린 채, 전쟁의 참화 속에서 쓸쓸히 죽어갔을까? 그렇게 죽어갈 때, 이들 머리 속에는 무엇이 스쳐 지나갔을까? 뒤에 남기고 온 아내와 아이들, 가족의 모습, 전장으로 떠나보낸 남편이나 아내,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봄이면 개나리 진달래 흐드러지게 피는, 소박하지만 한없이 편안하고 평화로웠던 고향집은 아니었을까? 


아주 가끔 흥얼거리는 노래 중 하나가 '비목'(碑木)이다. 그 노랫말을 새길 때마다 괜히 가슴 한 켠이 저려오고, 때로는 코끝이 찡하다. 한국 현대사의 한 비극, 그로 인한 슬픔을 이보다 더 지극하게 잘 표현한 노랫말도 달리 없으리라는 생각이다. 


초연이 쓸고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세월로 이름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울어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되어 쌓였네


수신인을 찾지 못한 채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에서 막히고 만 편지를 쓴 사람 중에, 저런 안타까운 추억을 생의 마지막 기억으로 간직하며 떠난 경우가 없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 비목의 노랫말이 새삼 더 처연하게 들린다.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의 출간이 가능할 수 있었던 데는 이 책의 엮은이 이흥환 씨(왼쪽 프레시안 사진)의 노고가 결정적이었다. 그는 '인터넷을 통한 한국 정보 서비스'라는 뜻의 키손(KISON, Korea Information Service on Net) 프로젝트 선임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를 수없이 드나들었다. 한국 근현대사 정보를 그곳보다 더 풍부하게 소장한 곳도 달리 없기 때문이었다. 


2008년 11월 그는 NARA의 열람실에서 한국전 당시 미군이 노획한 북한 문서의 목록을 작성하다가 이 편지들을 처음 만났다. 문서 상자 1100여 개를 이미 들여다본 상태였다. 편지들은 문서 상자 1138번과 1139번, 두 곳에 들어 있었다. 두 문서 상자에는 편지 728통과 엽서 344매가 들어 있었다. 노획 후 비밀로 분류해놓았던 것을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1977년 비밀을 해제해 일반에 공개했지만 이 편지들에 관심을 보인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중앙우체국 소인이 찍힌 것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미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 평양중앙우체국에서 미처 배달하지 못한 편지들을 대량 노획한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는 역사의 많은 부분이, 실상은 수많은 장삼이사들의 피와 눈물과 땀 위에서 진행되어 왔음을 웅변하는 한 증거이다. 그리고 우리가 제도 교육을 통해 배우는 역사라는 것의 대부분이 실상은 가식과 위선, 심지어 거짓으로 분식되어 있으며, 정작 우리가 알아야 하고 배워야 할 것은 그 베일 뒤에 가려 질식되거나 은폐되거나 억압된 진실, 숱한 민중의 절박한 목소리임을 새삼 일깨운다. 


이 책에 소개된 편지에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찬양, 현 체제에 대한 강한 신념, 인민군대의 정당성을 외치는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표현이나 내용을 담은 편지의 공감성이 가장 약했다. 진심 없이 겉도는 것처럼, 일종의 제스처처럼 느껴졌다. 도리어 여동생이 오빠의 무사귀환을 바라며 기도하는 편지에서, '편지야 빨리 가거라'라는 글로 다급한 심경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낸 편지에서, 훨씬 더 큰 감동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모쪼록 이 책이 더 많은 이들에게 읽히기를 바란다. 하여 더 많은 이들이 평화로운 남북통일을 꿈꾸고 지지하게 되기를 바란다. 무력으로 북한을 흡수 통일해야 한다고 짖어대는 자들도, 제발 이 책을 읽고, 그 무책임하고 저열한 생각을 바꾸기 바란다. 


* 이흥환 씨는 '씨'가 아니라 선배다. 시사저널 시절 선배이자 내 데스크였다. 내가 가장 존경했던, 그리고 지금도 깊이 존경하는, 선배다. 글과 생각과 행동이 같이가는, 보기 드문 사람. 이런 분을 알게 된 것을 내 인생의 한 행운으로 여긴다. 그리고 후배라고 잊지 않고 워싱턴 D.C.에서 멀고 먼 캐나다의 새알밭까지 책을 보내주신 데 대해서도 깊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