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책을 하나 읽었다. <Just My Type: a book about fonts>. 글자꼴에
관한 책이다. 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 글자꼴들이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끊임없이 새로운 글자꼴이 나오는지, 또 지금과 같은 글자꼴들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다채로운 인간의
드라마가 펼쳐졌는지,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쓰는 흔한 글자꼴들에 어떤 사연이나 비밀, 심지어 범죄가 숨어 있는지, 이 책을 통해 배웠다. 글자꼴에
대해 미처 몰랐던 크고 작은 사실들을 알게 된 즐거움, 흔히 쓰이는 글자꼴들이 가진 성격, 따라서 그런 글자꼴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성향 – type – 을 엿볼 수 있게 된 재미도 만만찮았다.
(책 제목의 type은 따라서 최소한 중의적이다. 하나는 글자꼴(typeface)이라는 뜻, 다른 하나는
글자꼴을 통해 드러나는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
라틴어에서 기원한 알파벳을 쓰는 나라, 그러니까 북미와 유럽 지역에는 현재 약 100,000개의 글자꼴이 있다고 한다.
1,000개도 아니고, 10,000개도 아닌 100,000개다.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글자꼴이 디자인되고 있다.
책은 표지의 발랄한 디자인만큼이나 자유분방하고 – 하지만 치밀하게 계산된 – 유머러스하고 창의적인 내용과 구성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지은이의 이야기 푸는 솜씨가 일품이다. 곳곳에, 글자꼴의 이름을 살짝 비틀어 쿡쿡 웃게 만드는 익살맞은 표현들이 숨어 있다. (이를 테면Comic Sans와Papyrus에얽힌얘기.)
책의 구성은 600년 가까운 글자꼴의 역사를 큼직큼직하고 주목할 만한 사건과 사안 위주로 매 장을 꾸미면서, 그 사이사이로 Gill Sans, Albertus, Futura v Verdana, Doves, Frutiger, Futura, Optima, Sabon 등 널리 쓰이는 글자꼴들에 대한 짤막한 읽을거리를 끼워 넣은 형식이다. (이들 중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에서 볼 수 있는 것은 Gill Sans와 Verdana뿐이지만 일단 그 모양을 보면 어딘가 낯익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본문에서 다루려는 글자꼴이 나오면 그 대목을 해당 글자꼴로 바꿔 보여준다는 점이다. 또 그 글자꼴이 쓰인 사례, 이를테면 책이나 앨범 표지, 도로 표지판, 사진, 그림 등 시각적 요소를 푸짐하게 곁들여 책 보는 즐거움을 더욱 높였다.
어느 분야든 그 분야가 사람들의 주목과 인정을 받기까지는 거기에 목숨을 건, 일생을 투자한 사람들이 헌신이 필요했다. 글자꼴 또한 예외가 아니다. 여기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흔한 위인전에서는 그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지만, 이들이 글자꼴 디자인과 개발에 바친 땀과 노력은 실로 경이롭고 존경스럽다. 광기와 집착에 가까운 헌신.
그러나 그런 창의와 집중, 헌신의 다른 편에는 그 열매만을 따 먹으려는, 훔치려는 자들이 있다. 인간 사회 아닌가. 나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자주 쓴 글자꼴 Arial이범죄의소산이라는사실을여기에서알았다. (온타리오주정부를비롯한공공기관에서가장애용하는글자꼴이바로 Arial이다.) 알고 보니 이 글자꼴은 마이크로소프트가윈도우운영체제를배포하면서라이선스비용을절약하기위해Helvetica글자꼴을도용한 결과물이었다. (그런사실을풍자한유튜브비디오까지만들어졌다. 상황이다종료된뒤나타난Comic Sans가압권.) Helvetica는지금도가장널리쓰이는글자꼴로, 그사회문화적영향력을다룬동명의다큐멘터리가나왔을정도이다 (예고편은 맨 아래). 하지만마이크로소프트워드로는그‘클론’ (혹은모작)인Arial만볼수있을뿐이다.
“왜그렇게나다양한글자꼴이필요한가고물을수있다. 이들은모두같은목적에봉사하지만인간의다양성을표현하기도한다. 와인에서찾을 수 있는것과같은다양성이다. 나는같은해에나왔지만각기 다 다른 60 종의메독와인리스트를본적이있다. 모두와인이지만다다르다. 중요한것은뉘앙스다. 글자꼴도마찬가지다.”
지금현재가장널리쓰이는글자꼴은Calibri다. Luc(as) de Groot이라는네덜란드의글자꼴디자이너가만든작품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오피스프로그램의우선글자꼴로정한것이큰이유지만, 바꿔말하면그만큼글자꼴이인식하기쉽고깔끔하며현대적이라는뜻도된다. 그렇다면이제더이상새로운글자꼴은나오지않을까?
“물론그렇지않다. 최고의글자꼴은아직나오지않았다.” 지은이가 자신있게 내리는 결론이다. 인류가생존하는한, 인간의 미적 감각이 유지되는 한,아마도그런일은벌어지지않을것이다. 별점은다섯에다섯. 아래 비디오는 다큐멘터리 Helvetica 전편 (저작권 허락을 받고 올린 것인지는 미지수. 그렇다면 얼마나 오래 유튜브에 머물러 있을지도 미지수. 오래 가지는 못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