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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fore the Poison: 전쟁보다 더 치명적인 독(毒)은 없다!

책 제목: Before The Poison
지은이: Peter Robinson
출판사: 하퍼룩스 (HarperLuxe)
판형: 페이퍼백 (글자 큼직큼직한 '라지 프린트')
분량: 594페이지
출간일: 2012년 2월21일

줄거리
크리스 라운즈 (Chris Lowndes)는 영화 음악 작곡가다. 지난 25년간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꽤 성공적인 삶을 살아 왔다. 그러나 나이 육십이 되면 어린 시절을 보낸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던, 아내에게 입버릇처럼 해온 말을 실행에 옮긴다.

그가 택한 곳은 요크셔 지방의 리치몬드 근교에 외따로 떨어진 낡고 오래된 장원 ‘킬른스게이트 하우스’ (Kilnsgate House)다. 세 가족은 거뜬히 살 것처럼 넓고 큰 이 집의 입주자는 그러나 크리스 혼자 뿐이다. 사랑하는 아내 로라는 수개월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 집은, 이를테면 크리스가 오랫동안 꿈꿔 온 귀환처이자, 잃어버린 아내에 대한 고통과 슬픔을 위무하기 위한 도피처이기도 한 셈이었다. 
 
크리스에게 “부끄러운 듯, 절반쯤 나무 뒤로 숨은 그 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꽤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는 기묘한 느낌”을 안겼던 킬른스게이트 하우스는 한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큰 게 분명했지만 집안 곳곳에서 묘한 매력과 수수께끼를 풍기면서 전 주인이 도대체 누구였을까,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한 번도 직접 와본 적 없이 인터넷의 사진과 부동산업자와의 이메일만으로 집을 구입한 데다, 집을 판 쪽이 소유주를 대리한 법률회사여서 전 주인을 알 도리가 없었다. 크리스는 알음알음으로 이 집의 전 주인 중 한 사람이 어니스트 아서 폭스라는 저명한 의사였으며 60년전 아내 그레이스 폭스에게 독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사건으로 인해 그레이스는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크리스의 호기심은 증폭된다. 마을의 저명한 의사, 그보다 훨씬 나이가 어리기는 하지만 아름답고 친절하고 따뜻한 그의 아내. 도대체 왜 살인 사건이 벌어진 것일까? 아니, 그것은 정말 살인 사건이었을까? 그리고 정말로 그레이스가 범인이었을까? 크리스는 자기도 모르는 새 그 사건에 빠져 당시 정황을 알 법한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 물어보고, 그레이스와 내연 관계였던 남자를 찾아 프랑스 파리로 가는가 하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 타운까지 날아간다. 주변의 지인들은 이미 50년도 더 넘은 옛일을 굳이 무엇 하러 들추느냐고 만류한다. 아내를 잃고 나서 약해진 마음이 정신병 수준으로 발전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크리스는 절대 그렇지 않다면서도, 자신이 왜 그레이스 폭스의 과거에 그토록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파헤치는지 스스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레이스 폭스의 삶을 찾아가는 크리스의 장정은 처음에는 그레이스에 대한 재판 과정을 묘사한 기록으로, 그 다음에는 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에 종군 간호사로 지원해 남지나해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노르망디에서 겪은 갖은 고행을 꼼꼼히 적은 그레이스의 일기로 구체화 된다. 그레이스의 일기 내용이 종전으로 가까워질수록, 크리스와 죽은 아내와의 관계가 그 위로 겹치고, 그레이스가 정말로 남편을 독살했는지의 진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독후감

영국판 표지.

피터 로빈슨은 헤닝 만켈, 마이클 코넬리, 케이트 앳킨슨 등과 더불어 내가 특히 좋아하는 작가다. 만켈 정도를 제외하면 “나 이 작가 잘 알아”라고 할 만큼 이들의 작품을 충분히 많이 읽지도 않은 마당이어서 좀 쑥스럽기는 하지만, 언제든 다 읽어 볼 생각을 갖게 하는 작가들인 것은 분명하다. 
 
영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문학 활동을 펼치는 - 토론토가 주 거주지다 - 피터 로빈슨의 문장은 참 꼼꼼하고 단정하고 섬세하다. 지식인스러움이랄까 교양인의 느낌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그런 글이다. 얼굴을 봐도 참 반듯하고 점잖은 인상인데, 문장이 꼭 그 인상 그대로다. 사물이나 상황을 묘사하는 문장의 촘촘함에서, 이 작가의 침착하고 꼼꼼한 관찰력이 뚝뚝 묻어난다. 

피터 로빈슨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앨런 뱅크스 (Alan Banks) 경감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시리즈로 유명하다. 하나같이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이 시리즈에서, 앨런 뱅크스는 헤닝 만켈의 커트 왈란더나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쉬에 견주어 퍽 안정적이고 자기 절제도 강한, 가장 이상적인 수사관이다. 카린 포섬의 콘라드 세저처럼 거의 철학자 수준까지 가지는 않지만, 우리가 기꺼이 믿고 싶은 그런 사람이다.
 
<Before the Poison>은 단행본이다. 앨런 뱅크스도 물론 나오지 않는다.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작곡가로 꽤 성공한 크리스 라운즈가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의 성격이나 행동 양식은 여러모로 앨런 뱅크스와 비슷하다. 외로움에 젖고 종종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울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그의 사고와 행동은 퍽 듬직하고 안정적이며 차분하다. 
 
책 제목은, 다른 수많은 책들이 그런 것처럼 단지 ‘독살 사건 이전’으로 번역하고 말 제목이 아니다. ‘독’, ‘독약’, ‘독살하다’ 같은 뜻을 갖는 ‘Poison’이 매우 다의적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의미는 물론 그레이스가 남편을 죽이는 데 썼다고 하는 독, 혹은 독살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 의미는 그레이스가 종군해서 겪는 전쟁의 참혹한 실상, 전쟁 속에서 벌어지는 천인공노할 학살상이다. 사람이 벌여서도 안되고 겪어서도 안되는 전쟁의 비극, 그 만행이, 전쟁의 포화와 총칼 끝에 놓인 사람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로 - 독으로 - 작용하는가를 웅변하는, 은유로서의 독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책을 ‘로맨틱 스릴러’라고 표현했다 (뉴욕타임스 리뷰). 이 소설이 앨런 뱅크스를 내세운 범죄 추리소설과 하늘과 땅 만큼이나 먼 거리에 놓여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내게는 전쟁의 비극을 곡진하게 표현한 회고록의 성격도 느껴졌고, 서구 사람들이 자주 집착하곤 하는 ‘족보 찾기’의 여행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영국과 미국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활 양식과 사고 방식을 맛깔스럽게 묘사하는 로맨스 소설처럼 읽히기도 했다. 아니, 그 세 가지를 적절히 버무린 문학 소설로 읽혔다.

등장 인물들은 길게 나오든 잠깐 단역으로 나오든 분명한 개성을 잘 드러내 보여서,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크리스가 어떤 소설을 읽는지 – 앨런 퍼스트, 가즈오 이시구로 – 어떤 음악을 듣는지 – 슈베르트, 말러, 다양한 재즈 음악 – 어떤 영화를 보는지 – 나는 제목조차 생소한 태곳적 ‘클래식’ 영화들 – 에 대한 묘사도, 내게는 더없이 흥미로웠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2차 세계대전 때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자주 놀랐고, 왜 전쟁이란 어떤 명분과 이유로도 결코 일어나서는 안되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흔히 남자들의 일 – 야만 – 로만 치부되기 쉬운 전쟁에서, 여자들이 얼마나 깊고 큰 공헌을 했는지를 생생하게 간접 체험할 수 있었던 것도 이번 독서의 큰 소득이었다. 실로 감동적인 소설이자, 왜 피터 로빈슨을 그저 '추리소설 작가' 정도로 좁게 규정해서는 안되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준 가작. 별 다섯에 다섯.

(Update - 2012-09-20-목) 이 책은 2012년 아서 엘리스상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을 갖췄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