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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혼의 의미를 새삼 되묻다 -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결혼 계획' (The Marriage Plot)

제목: 결혼 계획 (The Marriage Plot)
지은이: 제프리 유제니디스 (Jeffrey Eugenides)
형식: 오디오 북 (Audible Audio) - 새알밭 전자도서관에서 빌려 들음.
내레이터: 데이비드 피투 (David Pittu) 
분량: 15시간 35분 (책 내용 전체를 담은 것. 축약본이 아님).
출판사: 맥밀란 오디오 
오디오북 출간일: 2011년 10월11일
언어: 영어

오디오 북
 
오디오 북은 거의 듣지 않았다. '건지 감자파이 겸 독서 클럽'(The Guernsey Literary and Potato Peel Pie Society)을 우연히 오디오 북으로 듣고 좋은 인상을 받기는 했지만 역시 책이 더 좋았다. 활자가 더 좋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차 안에서 책 읽는 게 무척 피곤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눈도 날이 갈수록 더 침침해지는 판에,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게다가 종종 불충분한 조명 아래서 책 읽는 게 노동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었다. 책이 별로 재미 없을 때는 퇴근 시간의 절반 이상을 잠으로 때우기도 했다.

스티브 잡스

그러다 스티브 잡스 자서전을 들으면서 오디오 북에 대한 시각을 바꿨다. 어 이거 들을 만하네? 도서관에서 CD 20장짜리 방대한 오디오 북을 빌려다, 몇 시간에 걸쳐 mp3 파일로 리핑(ripping) 했다. 그리곤 틈틈이 듣기 시작했다. 월터 아이작슨이 참 글을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티브 잡스 본인은 물론 그의 친구나 동료, 심지어 그의 라이벌, 그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들의 증언까지 다 모아서 균형잡힌 내용으로 잘 버무렸고, 그것을 흥미진진한 드라마처럼 치밀하고 용의주도하고 배열했다. 내레이터의 목소리는 명료했고, 적절한 포즈와 강세로 이야기의 틀거지에 살을 더했다. 

스티브 잡스 자서전은 절반쯤 듣다가 말았다. 후반으로 가면서 흥미가 다소 반감되는 느낌이 컸다. 숱한 뉴스와 코멘터리를 통해 다 알고 있는 내용의 종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도 들었다. 물론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음에 혹시 생각이 난나면 나머지 부분도 들어볼 생각이지만...

결혼 계획

처음 이 소설을 귀로 들으면서 (머리 속으로는 종종 활자를 읽는 듯한 착각도 하면서) 깜짝깜짝 놀란 것은 이 소설을 구성한 문장의 밀도였다. 수십 년의 관록을 가진 장인이 보석을 정밀하게 세공한 것처럼, 문장은 촘촘했고 리듬감을 품었고 곳곳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풍경이나 심리 묘사, 등장 인물들 간의 대화도 미리 잘 계산해서 정교하게 짜넣은 맞춤형 가구처럼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무엇보다 이야기 자체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매들라인 (매디), 레너드, 미첼, 세 남자의 삼각 관계를 축으로, 그 친구와 가족, 대학 동기, 직장 사람들의 이야기를 양념처럼 고루 적절히 뿌려넣은 로맨스 소설. '아, 이 책이 여러 매체에 소개되고 칭찬되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나...!' 

물론 이 때만 해도 나는 작가 제프리 유제니디스가 그렇게 유명하고 이미 일가를 이룬 중량급 작가인 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오프라 윈프리가 침이 마르게 칭찬한 책 '미들섹스'의 지은이가 바로 이 사람인 줄도 미처 몰랐다. 나는 다만 책 제목이 좀 특이했고 - 그러면서도 그 때문에 관심이 덜 갔고... '결혼 계획? 부부의 갈등 얘긴가? 이런 얘긴 이제 너무 식상한 것 아냐? ... - 여러 언론에서 앞다퉈 좋은 책이라고 소개해서 그냥 그런가보다, 혹시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살펴보...게 될까? 정도였다. 그러다 새알밭 도서관의 전자책 사이트에 이 책이 'available' 하다길래 '나도 한 번' 하는 심정으로 받아본 것이었다. 그러니 작가 이름이나 이력에 큰 관심이 없을 수밖에...

줄거리
 

소설은 세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소설 속에서도 종종 그런 암시를 내비치지만, 이야기의 기조는 헨리 제임스, 제인 오스틴 같은 옛 작가들의 소설, 특히 사랑과 결혼을 주제로 내세운 이야기들을 변주한 것처럼 여겨진다 (유제니디스 스스로도, 제인 오스틴식 이야기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현실을 슬퍼한다). 매디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딸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고, 대학 생활의 대부분은 마치 그 환상을 좇는 흥미로운, 위험한, 때로는 부주의한 모험처럼 그려진다. 그리고 레너드에게서 자신의 참사랑을 발견했다고 믿는다. 

한편 미첼은 매디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자신의 운명적 사랑이라고 믿고 일편단심 매디만을 좇지만 그의 어눌함, 미숙한 표현 방식은 도리어 오해를 부르고, 도리어 매디가 그를 멀리하게 되는 빌미로 작용한다. 매디도 미첼의 매력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그는 다만 친구일 뿐이고 진정한 결혼 상대자는 될 수 없다고 믿는다. 

매디가 운명의 사랑이라고 믿는 레너드도 정상적인 인물은 아니다. 겉으로는 쿨하고, 매디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굴지만 속마음은 다르다. 매디에 대한 그의 사랑법은 여러가지 면에서 왜곡되고 비정상적인데, 이는 그의 남다른 성장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의 예측불가능한 행태는 소설을 듣는 내내 수수께끼였다.

소설은 이 세 사람의 행적을 교차해 보여주면서 진행된다. 레너드와 매디의 관계는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일종의 '상호 작용'인 반면, 유럽으로 인도로 여행하며 자신을 - 혹은 매디의 사랑을 - 찾아나선 미첼의 여정은 대개 명상적이다. 이 세 사람의 삶의 궤적이 뒤에 다시 교차되는 것은 물론이다. 

재미있었지만...

나는 두 가지 면에서 이 소설에 다소 실망했다. 첫째는 제목. '결혼 계획.' 이것은 매디가 대학 시절에 쓴 한 에세이의 제목이다. 매디 하나만 놓고 본다면, 그리고 소설에 묘사된 그의 삶의 행적만 놓고 본다면, 과연 이 소설은 결혼 하나로 귀결된다. 그러나 그 결혼은, 그리고 매디의 행적은 내게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야말로 고생 모르고 자란 부유층 딸의 감정적 사치와 자부심(오만과 편견의 '오만'?)을 변주한 데 지나지 않는 듯했다. 매디에 집착하고 정신병적 증세를 보이는 레너드의 행동과 논리도, 내게는 별다른 설득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숱한 문제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더더욱이 레너드가 사실은 매디와 맞지 않는다는 점이 명약관화하게 드러났는데도 그와 헤어지지 않고 이혼하지 않는 매디의 행태도, 특히 그의 그간의 이력과 배경을 고려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었다.

미첼의 행적은, 적어도 중후반부까지는 퍽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자신을 찾는,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규명하는, 매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반추하고 명상하는 미첼의 여정은 소설에서 중요한 한 축을 구성했다. 그러다 후반으로 가면서 갑자기 사라졌다. 다 타고만 촛불처럼 너무나 허무하게 매가리없게 사그라들었다. 도대체 1년 넘게 유럽으로 인도로 여행하며 배운 게 무슨 의미였단 말인가?!


둘째로 실망한 부분은 결말이다. 제인 오스틴 류의 결말을 기대한 내가 잘못인지도 모르지만, 현대의 성 모랄, 현대의 결혼 윤리를 감안하더라도, 세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유제니디스식 결말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승전결에서 결이 빠진 듯 힘이 빠지고 에이,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별점은 다섯 개중 네 개. 이 별 네 개중 적어도 한 개는 맛깔스럽게 이야기를 들려준 내레이터 데이비드 피투에게 가야 마땅하다. 혼자서 여러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잘 변주하면서 실감나게 연기해 주었다. 매디의 목소리가 조금 거슬리기는 했는데, 그의 우유부단하고, 똑똑한 척하지만 정서적으로는 미숙한 주인공의 면모를 드러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