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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 심포니 - 신선하고 약동하는 에너지로 충만했던 베토벤의 밤

밴쿠버 심포니의 연주회를 처음 봤다. 신선한 충격. 이 정도로 민활하고 정력적이며 단정하고 균형 잡힌 합주력을 보여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특히 베토벤 교향곡 7번에서는 약동하는 에너지와 경쾌한 템포로 어젯밤 연주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후반에 들려준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도, 7번만큼 생명력 넘치는 소리를 들려주지는 못했지만 '수연'이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은 자리였다. 핑커스 주커만의 협연도 명불허전. 베토벤의 다소 괴짜스러우면서도 거침없는 천재성이 잘 표현된 밤이었다. 

오늘의 메뉴: VSO 음악감독 브램웰 토비 (왼쪽)와 바이올린 협연자 핑커스 주커만.



들임말:
밴쿠버에 3박4일 일정으로 왔다가 우연히 날짜가 맞아 난생 처음 밴쿠버 심포니의 연주를 직접 볼 기회를 가졌다. 레퍼토리는 온통 베토벤 - 내가 서곡중 가장 좋아하는 에그몬트 서곡으로 시작해, 역시 베토벤 교향곡중 가장 즐겨 듣는 7번을 거쳐,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게다가 협연자는 안내 책자에서 '전설의 거장'이라고 칭송해 마지 않은 핑커스 주커만 (Pinchas Zukerman). 이를 '금상첨화'라고 하면 맞을까?

가는길: 밴쿠버 다운타운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돌연 때아닌 폭설이 내려 - 여기가 에드먼튼이 아닌 밴쿠버라는 점을 잊지 마실 것! - 혹시 못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살짝 들었으나, 막상 차를 몰고 나설 무렵에는 눈이 그쳤고, 그것마저도 대로에서는 거의 다 녹아 운전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도로는 곳곳에서 정체, 2명 이상 탄 차만 다니게 해놓은 HOV 차로를 타지 않으면 서다가다를 숱하게 반복해야 할 듯싶었다. 게다가 곳곳이 도로 확장 공사중이어서 더 복잡했다.

오르페움 씨어터의 멋진 실내 구조.



심포니 홀: 오르페움 씨어터 (Orpheum Theatre). 대개 큰 돈을 쾌척한 사람의 이름을 딴 이 즈음의 흐름을 아직까지는 타지 않은 반가운 이름. 당장 에드먼튼 심포니의 전용 홀 이름도 거액을 기부한 사람의 이름을 딴 '윈스피어 센터'다. 홀은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좌석과 출입구가 비좁아 드나들기에 다소 불편하긴 했지만 천장의 그럴듯한 벽화며, 기둥과 벽에 새긴 문장과 무늬도 퍽 장려했다. 다만 무대를 확장할 수 없는 구조여서 대규모 공연을 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를 듯했다. 홀의 울림은 좋았다. 2층 중간쯤에서 들었는데, 속삭이는 듯한 바이올린의 피아니시모 소리도 선명했고, 오케스트라 총주도 뭉개지거나 과장되지 않고 잘 균형 잡힌 소리로 들렸다.

오케스트라: 가장 놀란 부분. 아니 내 '편견'이 깨진 부분, 이라고 해야겠다. 특히 한 동료로부터 전해 들은 풍문, '에드먼튼 심포니보다 못하다' - 아니 '에드먼튼 심포니가 낫다'라는 게 바른 표현이었다 - 라는 말은, 말 그대로 낭설에 불과했다. 이 정도면 세계 무대에 나가도 전혀 손색이 없겠다고 여겨질 정도로 훈련이 잘돼 있었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손끝과 몸짓에 기민하게 반응하면서, 실로 단정하고 말끔하고 균형잡힌 소리 - 이 말을 참 자주 한다 - 를 시종 들려주었다. 혼과 트럼펫 부분에서, 오케스트라의 소릿결과는 다소 맞지 않는 듯한 소리가 몇번 튀기도 했지만 그건 옥의 티에 불과했다. 특히 베토벤 7번의 4악장에서 유감없이 펼쳐보인 작열하는 에너지의 향연은 밴쿠버 심포니가 결코 이름없는 변방의 오케스트라가 아님을 벽력같이 웅변한 상징 같은 대목이었다.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도 오케스트라는 여유로우면서도 유려한 소리로 협연자 - 핑커스 주커만 -를 잘 받쳐주었는데, 워낙 오케스트라 파트가 승한 베토벤 협주곡의 특징 때문인지는 몰라도 종종 협연자 소리보다 오케스트라 소리가 더 물결치듯 도도하고 두드러진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주커만은 아마도 수십 번 넘게 이 곡을 켰을 터이므로, 더할 나위 없이 여유만만했다. 소리도 명징했다. 관중은 무슨 팝 콘서트에 온 것처럼 브라보를 연창하며 열광했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가서 도리어 더 큰 만족감을 안고 돌아온 연주회였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도 또 가보고 싶다. 밴쿠버 심포니의 어젯밤 연주회 평점은 A+. 별 다섯에 다섯. 

사족: 클래식 음악의 사망, 까지는 아니어도 쇠퇴를 보여주는 현상은 여기에서도 또렷했다. 지팡이를 짚거나,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힘겹게 걷거나, 휠체어를 타거나, 흰머리 눈부신 노년층이 관중의 7, 8할은 되는 것처럼 보였다. 마음대로 활보하기 힘들 정도로 곳곳에 포진한, '기부하시죠'를 요청하는 자원봉사자들도 인상 깊었다. 책자를 보니 오케스트라의 연 운영비로만 1,300만달러 정도가 든다고 한다. 관객 동원만으로는 그 3분의 1도 채우기 어려울테고, 그렇다고 베를린필처럼 음반을 줄줄이 내는 것도 아니고... 결국 '문화 진흥' 차원에서 캐나다 정부, BC 주정부가 목돈을 들이고, 독지가와 음악 애호가들이 기부하는 길만이 오케스트라를 '연명' - 성공은 그만두고 - 시키는 길이라는 얘기다. 오케스트라라는 조직 자체가 어쩌면 생래적으로 생존 불가능한 공룡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천장의 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