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 얘기

데이트

월요일 휴가. 내일 출근하면 수요일을 다시 쉬고, 다음 주 월요일도 또 쉰다. 이렇게 징검다리 휴가를 쓰고 있는 것은 올해 회계연도가 끝나기 전까지 (그러니까 3월31일 전까지), 내년으로 이월되지 않는 휴가를 소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 쓴 휴가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할 수도 있지만 그건 회사 쪽에서 원하는 바가 아니란다. 그래서 일이 바쁘든 말든 어쨌든 3월이 가기 전에 휴가를 써야 하는 거다. 한국쪽 정황에 견준다면, 애먼 보도 블록을 뒤집는 형국이랄까?


게으르게 일어나, 아침 굶고 커피 굶은 채로, 동준이는 스쿨버스에 태워 보내고, 성준이는 차로 학교에 내려준 다음, 아내와 함께 '피 뽑으러', 그러니까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갔다. 린 밸리 클리닉이라는 워킨클리닉 - 예약 없이 그냥 들어가 자기 차례가 되면 의사를 만나게 돼 있는 클리닉, 가정의를 구하지 못해 그냥 이곳을 이용한다 -이 입주한 건물이다. 가까워서 좋고,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좋았다. 



기다리는 동안, 또 먼저 끝나고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 저 포스터를 유심히 살피다가, 직원의 동의를 구한 뒤 사진을 찍었다. 직업 의식의 발동인 셈인데, 저런 포스터를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도 하루 빨리 만들어 BC주 애보리지널 주민들이 사는 클리닉들에 붙여야 할 것 같아서 참고 삼아 찍었다. 


건강 검진을 마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아이들은 봄 방학이 끝나 학교로 돌아갔고, 이제 나와 아내는 실로 오랜만에 둘만 기분을 낼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어, 이거 데이트 기분인 걸? 농담하듯 말하면서 서로 씩 웃었다. 아내에게 좀더 자주, 혼자서 한가로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줘야 할텐데... 



클리닉에서 도로 하나만 건너면 쇼핑몰과 도서관이 있는 '린 밸리 빌리지'다. 도서관에 들러 빌린 책을 돌려주고, 찜해둔 책을 찾았다. 지금 아내는 성준이한테 밤에 읽어줄 만한 어린이 책을 둘러보는 중이다.



아침도 굶고 커피도 굶은 터라, 도서관 건물에 함께 들어 있는 '들레이니스' (Delaney's)라는 카페에 왔다. 밴쿠버 지역에 대여섯 개의 가맹점을 가진,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프랜차이즈다. 하지만 실내 분위기도 좋고 위치도 워낙 좋아서 제법 성업 중인 듯했다.




다음 차례는 3월 말로 문을 닫는 블랙본드 서점 구경이었다. 블랙본드는 BC주의 독립 서점인데, 장사가 안 돼서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했다. 회사 자체는 제법 자본력이 있는 듯해서, 큰 타격인 것 같지는 않다. 이 가게는 장소만 다른 데로 옮기는 거란다. 아무튼 가게 이전을 앞두고 여러 달 동안 책들을 할인해 팔았다. 나로서는 이 서점에 가외로 고마운 것이, 서점 벽에 붙어 있던 포스터 몇 장이 마음에 들어 팔라고 했더니 비매품이라면서 거저 주었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책을 아홉 권이나 샀다. 책이 거의 다 빠져나가 서점 안을 둘러보고 책 제목을 훑어보기가 더 용이해져서 그랬던 건지, 좋은 책들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띄었다. 이 아홉 권도, 스티븐 킹의 책 세 권을 어렵사리 제외해서 줄인 숫자다. 서점을 나오는 길목에 저런 방명록이 놓여 있었다. 아내는 '책을 직접 둘러보고 고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없어지게 돼 유감이다. 행운을 빈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이 사진은 요즘 종이 신문으로 다시 구독 중인 <밴쿠버 선> 주말판의 책 관련 기사. 학계의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작문 솜씨를 신랄하게 꼬집는 글로, 각각 하버드대 출판부와 옥스포드대 출판부에서 나온 관련 책 두 권과 연관지어 신문사 칼럼니스트인 더글러스 토드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