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봄이다. 맑은 날이 이어지고, 낮 기온은 10도를 넘어선다. 햇살은 예전보다 더 눈부시고, 조금씩 더 따갑게 느껴진다. 게다가 이번 주말부터 일광 시간 절약제가 시작된다.
한국에서 큰 처형이 잠시 밴쿠버에 들르셨다. 방문의 주목적은 질환이 깊어진 부친을 뵙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실내에만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말을 맞아 써리 남쪽에 있는 관광 타운 화이트 락 (White Rock)을 찾았다. 몇년 전, 아직 알버타 주에 살던 시절에, 역시 관광객 기분으로 들른 적이 있지만, 우리도 동네에 그리 낯익지는 않았다.
와본 지 오래됐다는 점은, 차를 너무 멀리 대놓고 바닷가 번화가까지 걸어가겠다는 계획에서 잘 드러났다. 'Buena Vista Avenue'라는 이름만 보고, 경치가 좋다는 뜻이니, 아마도 이쯤에 차를 대고 걸어가면 되겠지,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멀었다. 그래서 나는 두 아이들과 함께 언덕을 걸어서 내려가고, 아내는 다시 차를 몰아 처형과 장모님을 태우고 앞서 바닷가 주차장으로 갔다.
높은 언덕에 선 덕택에 바다가 멀리 보였다. 수평선 위로 보이는 육지는 미국이다. 화이트 락과 마주 보고 있는 미국쪽 동네의 주거지 중 절반 이상이 캐나다 사람들 소유라는 얘기도 있다.
바다 옆으로 철로가 지나고, 그 철로 옆으로 이렇게 산보용 보도가 조성되어 있다. 사람들이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한국의 높은 인구 밀도에 익숙한 처형께서는 뭘 이 정도를 가지고 그러시느냐고 했지만, 나나 아내에게는 '너무 많은' 인파였다. 물론 이 사진에는 그런 인파의 심각성이 드러나지 않았다.
철길을 가로질러, 저렇게 바다 위로 보드워크 (Boardwalk)가 나 있다.
성준이는 보드워크를 걷는 일보다 그 아래 바닷가로 내려와 돌멩이를 던지고, 가능하다면 물수제비를 뜨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뜻대로 물수제비가 되지는 않았다.
잠깐 가족 사진. 아주 단란하고 행복해 보이게 나왔다. 사진으로만... 하하.
멀리로 눈을 하얗게 인 베이커 산 (Mt. Baker)가 보인다. 눈의 질이 좋기로 유명한 동네다. 캐나다에서 가까워 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나도 한 번 가봐야지, 생각만 하는 중이다.
화이트락이라는 동네 이름이 혹시 저 하얀 (White) 바위 (Rock)에서 나온 게 아닐까? 마침 화물 열차가 지나가는 중인데, 철길 근처에 사람이 워낙 많은 탓에 기차는 약간 지겹다고 여겨질 정도로 경적을 울려댔다. 저 열차 뒤로 연결된 화물 칸이 족히 100대는 될 듯했다. 엄청나게 긴 행렬이었다.
보드워크 위에서.
화이트락을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보드워크. 이쪽 언덕에서 내려다본 풍경이다.
인파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차량 행렬.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숨이 막힌다. 밴쿠버를 찾는 이들에게 한 번쯤 보여주려 다시 찾아올 수는 있겠지만, 우리끼리 일삼아 올 일은, 오고 싶어 할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듯했다. 사람이 적당히 많으면 괜찮지만, 뭐든지 줄을 서야 하고, 길을 걸을 때도 마주 오는 사람과 부딪힐까봐 신경을 써야 할 정도로 많아지면, 피곤하다.
베트남 국수집에서 저녁을 먹기 전에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식사 전에 후식부터 먹은 셈인데, 동준이와 성준이가 워낙 성화를 부리니 순서와는 상관없이 불평을 잠재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문제는 이 같잖은 아이스크림을 사는 데도 20분 이상 기다려야 했다는 점. 정말 싫은 일이었다.
일요일. 아침을 한 시간 까먹었다. 일광 시간 절약제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만든 인위적 제도 가운데 내가 가장 혐오하고 경멸하고 증오하는, 하여 정치인들에 대한 나의 불신을 더욱 강고하게 굳히는 우행, 아니 범행이 바로 이 말도 안 되는 일광 시간 절약제이다. 정말 이 날이 시작될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그래서 가능하면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정말 미친!
어쨌든 뛰러 나섰다. 어디로 뛸까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세컨드 내로우즈 다리를 건너 밴쿠버 스탠리 공원을 거쳐서 라이온스 게이트 다리로 다시 노쓰밴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잡았다.
세컨드 내로우즈 다리를 건널 때쯤 아주 늘씬하고 군살 없는, 정말 아름다운 'Runner's body'를 갖춘 여성 달림이를 만났는데, 다리의 비탈을 올라갈 때 잠깐 추월한 직후, 위와 같은 사진 몇 장을 찍는 사이 다시 추월을 당한 뒤, 끝끝내 따라잡지 못했다. 하여 스탠리 공원에 이를 때까지, 그러니까 거의 16 km 정도를, 그 여성을 50-100미터 정도 앞에 두고 뒷모습만 보면서 뛰었다. 나는 그 여성이 물통이나 아무런 장거리 달리기용 장구를 몸에 두르지 않아서 몇 km 뛰다 돌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아무것도 마시지 않은 채 그 긴 코스를, 속도나 페이스도 거의 떨어뜨리는 법 없이 참 잘도 달렸다. 덕분에 그 여성의 군살 없는 몸매를 멀리서나마 원없이 감상하기는 했다. 나보다 두세 배는 더 나은 달리기 내공을 갖춘 게 분명했고, 그래서 달리는 데 적잖은 자극도 되었다.
이스트 밴쿠버에서 바라본 노쓰밴 풍경. 노쓰밴의 시가지, 그 위로 사자 모양 봉우리 (Lions Peaks)가 보이는 노쓰 쇼어의 산이 새삼 멋있어 보였다.
봄을 보여주는 벚꽃. 봄에는 역시 벚꽃이다.
밴쿠버 다운타운이 가깝다. 멀리 하버센터, 밴쿠버 선, 캐나다 플레이스 빌딩들이 보인다.
라이온스 게이트 다리를 건너는 중. 맞은 편으로 달리기 클럽 멤버들로 보이는 달림이들이 스탠리 공원 쪽으로, 그러니까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달림이들의 복장은 늘 눈에 잘 띄는 형광색이지만 여성 달림이들의 복장은 유독 더 튄다. 저 멀리 검은색 빌딩이 내가 소속된 직장의 본사다. '100 파크 로열'이라는 주소지인데, 우리는 흔히 'Black Tower'라고 지칭한다. 그 옆 연두빛 지붕을 가진 빌딩은 콘도 (한국식으로 하면 아파트)이다.
가족과 만나기로 한 론스데일 부두에 닿았다. 은단풍이 잎을 틔우기 직전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달려오는 중. 일요일 점심 때가 가까운데도 부둣가는 한산했다. 그래서 좋았다. 어제 화이트락에서 겪은 인파의 경험을 생각하면...!
부둣가에서. 멀리 밴쿠버 다운타운이 보인다. 저기까지의 직선 거리는 아마 3 km 안팎일 것이다.
론스데일 트레일에 서 있는 돌하루방. 한국에서 기증한 기념품이란다.
성준이 뒤로 보이는 검고 구불구불한 철사들은, 얼핏 보면 무슨 거미나 괴물 같지만 노쓰 쇼어에 지천으로 놓인 산들을 표현한 조형물이다.
론스데일 바닷가를 포함해 노쓰쇼어의 '쇼어' 지역들은 스쿼미쉬 (Squamish) 퍼스트 네이션의 영토이다. 그래서 이런 토템폴이나 상징물이 많다.
그 퍼스트 네이션의 영토 안에 있는 '모스퀴토 크리크 정박지' (Mosquito Creek Marina)의 수상 가옥들. 다른 육지의 집들보다 값이 싸서 아내에게 우리도 이런 데 한 번 살아볼까? 했다가 단칼에 거절당했었다.
작은 정원의 해바라기 형상, 그리고 그 해바라기처럼 웃는 성준이.
론스데일 부두에 있는 '빈 어라운더 월드' (Bean Around The World) 커피점에서 주문한 제품을 기다리는 중. 두 녀석은 핫 초콜렛, 나는 페루산 커피빈 두 봉지. 흔히 BATW로 약칭되는 빈 어라운더 월드는 스타벅스와 팀 호튼스의 맹위 속에서도 용케 틈새 시장을 잘 공략해 성공적으로 생존하고 있는 밴쿠버산 '로컬' 커피 체인들 중 하나다. JJ Bean,블렌즈, 패럴렐 49, 웨이브즈 커피 따위가 그런 로컬 체인들이다.
거기에서 산 페루산 커피 두 봉지. 한 봉지는 처형께 드릴 변변찮은 선물. 한국의 형님께서 요즘 커피 마시는 재미에 빠지셨다고 해서, 캐나다산 커피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이건 물푸레나무의 꽃이다. 이 나무까지 이렇게 불그레한 꽃망울을 내놓기 시작했으니, 정말 봄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겠다.
론스데일 산보를 마치고 웨스트 밴쿠버로 건너와 파크 로열 쇼핑몰에 들렀다.
성준이는 캐나다의 초대형 서점 체인인 챕터스/인디고 (Chapters/Indigo)를 무척 좋아한다. 어린이 도서 코너에 책만 있는 게 아니라 레고 블록 같은 매력적인 장난감도 많기 때문.
성준이가 책과 장난감을 둘러보는 동안 나는 거울보고 셀피(Selfie)를 찍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달리고 나서 아직 옷도 갈아 입지 않은 상태다! 얼굴이 소금기로 버석버석했다. 오늘은 26 km 정도를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