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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무리하는 걸까?


지난 주에 이어 오늘(수)도 빅토리아 출장. 하지만 이번 것은 미처 예정에 없던 일이어서 교통편을 잡느라 애를 좀 먹었다. 갈 때는 수상 비행기로 쉽게 갔으나 오는 비행편이 만석이어서 국제공항을 이용해 웨스트젯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하루를 빅토리아에서 묵어야 하는데 그럴 마음은 없었고...


항공기는 이륙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착륙했다. 채 30분도 안 걸렸다. 하지만 활주로에 들어서고, 활주로에 내려 공항까지 닿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공항에서 스카이트레인으로 회사까지 와서 다시 자전거로 갈아타고 집까지 오니 어느덧 여섯 시 반. 낮이 길어졌다지만 아직은 겨울인지라 이미 사방이 깜깜했다. 그래도 집에 왔다는 안도감에 한없이 행복했다.



지난 몇 주간 매일 자전거로 통근을 했고, 점심 시간에는 달리기를 했다. 매주 다섯 번에서 네 번으로 - 토요일 포함 - 줄이기는 했지만, 내가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피곤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자전거 통근 거리만 따지면 왕복 24km 정도 되고, 점심 시간을 이용해 뛸 경우 보통 8-10km를 잡는다. 뛰지 않고 걷는 날은 대개 3-4km 정도. 주말, 대개는 일요일에 뛰는 장거리는 적어도 20km 이상 된다. 그래서 다 더하면 일주일에 150km 정도의 주행 거리가 나온다. 2주 전에는 160km 남짓, 지난 주는 193 km였다. 일요일 아침 동료와 달리기 위해 밴쿠버까지 자전거로 나왔기 때문에 24km가 더해졌기 떄문이다. 이번 주에도 대략 그 정도 거리가 나올 것 같다.


달리고 또 달리는 내 심사를 때로는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해 '왜?'에 대한 대답을 속시원히 내놓지 못할 때가 많다. 얼마전 리디북스를 통해 구한 소설가 김연수의 '지지 않는다는 말'에서 우연히 접한 다음과 같은 표현을 보고 무릎을 쳤다. 그 또한 심각한 달림이라는 점이 나와 비슷한 심리적 모순이랄까 오류를 종종 불러왔고, 그는 아마도 그에 대한 대답을 찾은 것 같았다.


오랫동안 나는 이런 활수(滑手)의 상태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궁금했다. (활수는 '무엇이든지 아끼지 않고 시원스럽게 잘 쓰는 씀씀이'라는 뜻.) 처음에는 몸이 건강해지니까 그런 여유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달리기 시작하는 이유가 거기 있었으니까. 하지만 몇 년이 지나고 보니 달리기 자체에 몰입하는 시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전혀 뛰고 싶지 않은데도 달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몸 때문이 아니라 마음 때문에 달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서는 아마도 매일 뭔가를 끝낸다는 그 사실에서 이 기쁨이 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통과 경험이 혼재하는 가운데, 거기 끝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자발적으로 고통이 아니라 경험을 선택할 때, 그리고 달리기가 끝나고 난 뒤 자신의 그 선택이 옳았다는 걸 확인할 때, 그렇게 매일 그 일을 반복할 때, 세세한 부분까지 삶을 만끽하려는 이 넉넉한 활수의 상태가 생기는 것이라고. 어쨌든 아직까지 그 이유는 모른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는 건 가능하리라. 달리기는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시작할 때 그렇지 않다면, 끝날 때는 반드시 그렇다.   


- '달리기는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중에서 


이게 과연 지속 가능한 (sustainable) 일인가, 자문하곤 한다. 피곤하고 힘들다. 하지만 못 견디겠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선뜻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누가 하라고 등 떠미는 것도 아니고, 아내는 도리어 좀 살살하라고 말리는 처지인데, 자기 자신이 가장 엄격한 심판관이자 비평가라는 말은, 그래서 맞다. 좀더 두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