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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비늘

와와, 온타리오


수요일 점심, 달리기를 하고 사무실로 돌아와 점심을 먹으며 CBC 뉴스를 둘러보는데, 'Wawa'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와와. 이게 얼마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냐! (와와 시절에 쓴 글을 이 블로그로 옮겨 비슷한 내용들끼리 묶어 놓았).


제목인즉, 'Wawa gets blasted by snowNorthern Ontario getting 40 cm of snow in some areas as Environment Canada issues a winter storm warning'이다. '눈벼락 맞은 와와 - 캐나다 환경부 대설경보 발령 가운데 북부 온타리오 일부 지역 40cm 폭설'쯤 되겠다. CBC의 온타리오 북부 뉴스 채널인 CBC 서드버리 (Sudbury)에서 전하는 영상이었다. 유튜브 비디오를 찾아 아래에 박아놓았는데, 아나운서나 기자의 목소리도 없이 그저 이미지뿐이다. 눈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와와 모터 인이며, 우체국 근처, 동네를 가로지르는 대로 등이 여전히 낯익었다.



토론토대 대학원에서 임학을 공부한 뒤, 2004년 11월부터 2005년 8월까지, 10개월 정도 와와에서 처음에는 계약 산림관 (Contract Forester)으로, 다음에는 산림관 인턴으로 일했다. 소속은 온타리오주 정부 산하 자연자원부 (MNR, Ministry of Natural Resources)였다. 당시 급여는 격주로 800달러 정도였고, 착실히 경력을 쌓다가 영구 산림관 자리가 나오면 지원해 취직하는 게 꿈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준이의 오티즘 치료와 서비스가 대도시에서만 가능한 데다, 2년여를 기다린 끝에 겨우 얻어낸 정부의 오티즘 진료 지원금을 계속 받자면 토론토에 머물러야 했다. 토론토를 떠나면 자격 상실이었다. 저 10개월 동안, 나 혼자 와와에 살면서, 2-3주에 한 번씩 토론토에 내려와 가족을 만났다. 왕복 2000km 정도의 멀고 먼 장정이었다. 그 때 몰고 다니던 혼다 시빅은 정말 고장 한 번 안 나고 나를 잘 태우고 다녔고, 그래서 아직도 시빅만 보면 애정이 느껴진다. 


겨울철 운전, 특히 캐나다 북부, 슈피리어 호수를 따라 올라가는 17번 고속도로 운전이 얼마나 힘들고 무서운지, 그 때 느꼈다. 눈이 너무 많이 쏟아져 앞이 안보이는 이른바 'Whiteout'을 그 때 체험했다. 원해서 한 것은 물론 아니고, 집으로 내려갈 생각에 마음이 들떠 그날 일기 예보를 안 본 게 화근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론, 오후에 내 보스가 케빈 어디 갔느냐고, 이번 주말에는 내려가면 안된다고, 17번 고속도로 상에 폭설이 내려 도로가 차단될 공산이 크다고, 급히 회사로 돌아왔었단다. 하지만 나는 이미 고속도로를 탄 다음이었다. 


출발할 때만 해도 하늘은 화창했다. 눈이 내릴 기미도 안 보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는데, 돌리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눈이 폭포처럼 내렸다. 앞이 안보였고, 그나마 내 길잡이가 돼 준 건 바로 앞에 달리던 대형 화물트럭의 빨간 경고 미등이었지만, 그나마도 얼마 안 있어 눈에 파묻히면서 그저 억지로, 엉금엉금 바닥을 기듯, 앞으로 앞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전후좌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 눈, 눈이었다. 오른쪽으로는 슈피리어 호수가 펼쳐진 절벽이었는데, 다행히 눈둑과 가드레일이 있어서 혹시라도 차가 너무 밖으로 삐져나가면 거기에 튕겨져 다시 도로 안쪽으로 차가 밀려 들어왔다. 반대 방향으로 오는 차와 부딪히면 어쩌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나마도 없었다. 어느 순간 교통이 완전히 끊겼다.


중간에 차를 세울 수도 없었다. 세우면 끝장이었다. 주유소도, 휴게소도, 어디 차를 세울 공간도 없었다. 있다고 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냥 무작정 앞으로 앞으로... 운전대 앞으로, 앞 유리창에 거의 머리가 닿을 듯 몸을 앞으로 죽 빼서, 가능한 한 앞을, 앞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방향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소름이 돋았다. 아내와 동준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멀리 오렌지색 안전복을 입은 경찰들이 보였다. 그들이 빨간 경고 막대를 흔들며 차량을 통제하고 있었다. 반대 차선의 교통은 오래 전에 이미 차단된 상태였다. 그렇게 정지된 차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내가 통과하고 나서 얼마 뒤에, 내쪽 차선도 완전히 차단되었다. 그렇게 150km쯤을 온 거였다. 수 세인트 마리를 지나면서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발이 끊겼다. 해가 나왔다. 거짓말 같았다. 


눈 폭풍의 화이트아웃을 막 벗어난 다음, 석양을 바라보며, 한숨을 돌리며 이 사진을 찍었다. 바닥은 얼음이었다. 차 뒤에 코팅 되듯 붙은 눈덩이가 어디를 거쳐 왔는지 그 '과거'의 일단을 보여준다. 아, 살았다...하느님 감사합니다! 라고,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던 것 같다.


17번 고속도로의 수 세인트 마리-와와 구간은 그렇게 차단되어 이틀을 갔다. 뉴스에 따르면 그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게 된 운전자들은 인근 동네 사람들의 친절한 도움 덕택에 마을 회관, 민가 등에서 이틀을 묵은 뒤에야 가던 길을 다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CBC의 와와 폭설 소식을 보는데, 문득 옛 생각이 났다. 마치 다른 시대, 다른 세상에서 일어났던 것 같은, 아니 일어나기나 했던 걸까? 혹시 꿈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와와...그 시절에 사진도 많이 찍었는데, 컴퓨터의 하드디스크가 깨지면서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운 대목이다. 플리커에 올려놓은 이 정도 사진이 그나마 남은 내 인생의, '기억의 비늘'이다. 힘들었지만, 함께 일한 사람들이 좋아 행복했던 한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