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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비늘

국민학교 졸업 앨범

잦은 이사 와중에 잃어버린 것이 어디 하나둘이랴.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우발적으로, 참 많은 것을 잃었다. 의도적인 경우는, 이게 무슨 필요가 더 있으랴 싶어 내버렸는데, 나중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괜히 버렸다 끝까지 지고 오는 건데, 라고 후회하는 경우. 참 좋아했던 여러 한국 작가/평론가 들의 작품집들, 하루키 번역본들이 그 중 두 가지 사례다.


또 하나는 우발적으로 잃어버리고 안타까워 하는 경우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졸업 앨범도 그 중 하나. 언제 어디에서 유실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그러다 다시 만났다. 네이버의 닫힌 온라인 동아리 서비스인 밴드의 국민학교 동창회를 통해서다. 동창들 중 하나가 앨범을 스캔해서 올렸다.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를 만난 것과 비슷하게 반갑다. 



6학년2반. 모두 세 학급인 소규모 국민학교였다. 선생님 세 분끼리도 사이가 좋아서, 저렇게 각 반 졸업 사진 때 양 옆에 서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내가 통과해 온 제도 교육 시간을 통틀어 가장 존경스러운 선생님 서너 분 안에 들어가실 만한 분이다. 나도 선생님을 존경하고 좋아했지만, 특히 공부보다 놀고 장난치는 데 관심이 많고 사고 치기 바쁜 녀석들이 선생님을 더 존경하고 좋아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선생님도 그 친구들을 더 예뻐하셨다는 사실(느낌?)을, 나는 졸업하고 나서 뒤늦게 깨달았다. 저들 중 여러 명이, 자기 결혼식 주례로 선생님을 모셨다. 지금도 동창회 때는 세 분 모두 초대를 받고, 별일이 없는 한 세 분 모두 참여하신다. 캐나다에서 동창회 소식을 듣고 사진이나 글로 보면서, 나도 학교 다닐 때 좀더 까불고 사고 좀 칠걸...하고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 부러움이고 질투다.



어쩌다 보니 나는 선생님 바로 옆에 앉았다. 내가 반장이었던가, 아니었던가, 기억조차 아슴한데... 이들 중 한 녀석이, 선생님 좋다고, 저 멀리 교문으로 막 들어서시는 모습을 보고 다른 쪽 끝 교실 2층에서 "선생니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든 적이 있다. 그걸 보고 아마 다른 선생님이 - 아마 교감이나 교장이 그러지 않았을까? - 아니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저렇게 버릇이 없느냐고 한 소리 한 모양이었다. 잔뜩 화난 표정으로 곧장 교실로 달려오신 선생님은 그 친구를, 정말 무섭도록 팼다. 물론 그 친구는 울며불며 잘못했다고 빌었고... 어린 마음에는,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었나 싶었는데...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이 친구는 선생님을 더욱 열심히 따르고 좋아했다. 결혼식 때도 주례로 모셨다. 내가 보기엔 그저 무섭기만 했던 그 장면이, 혹시 그 친구에게는 '사랑의 매'라는 느낌으로 전해진, 그래서 선생님을 더욱 존경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문득 궁금했다. 아무리 어려도 그런 마음은 여실히 전해지게 마련이니까... 우리 가르치실 때만 해도 그토록 젊고 패기 있던 선생님이, 얼마전 동창회 사진을 보니 퍽 야위고 병약해 보였다. 마음이 아팠다. 물론 동창회의 게시판에 오른 메시지들도 다 그런 걱정들... 훌륭한 선생님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존경받는다. 이 때, 나는 참 행운아였다.



동창 얼굴들을 보면, 졸업 이후 대부분 연락이 끊기고 얼굴조차 잊었었는데, 다시 보면 그 얼굴이 떠오르는 게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다. 수십 년의 긴 세월을 통과해서도, 얼굴에 주름이 지거나 몸에 살이 붙거나 심지어 대머리가 되었어도, 40대 후반이 된 어른의 얼굴에는 어린 시절의 형상이, 이미지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게,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래도, 길에서 만나면, 아마 알아보지 못할 공산이 더 크겠지만...


앨범은, 사진은, 지나간 한 순간을 포착해서 보존한다.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된 옛 앨범의 얼굴들을 보면서 참 많은 상념을 갖게 된다. 그것은 슬픔도 기쁨도 회한도 희망도 아닌, 뭐라고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하고 착잡한 느낌이고 기분이다. 이렇게 한 세월이 흘렀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