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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의 새로움, 말러의 진정성

두 개의 인상적인 말러 연주를 들었다. 하나는 지난 10월2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LA필")의 2014/15년 시즌 오프닝에서 연주된 5번이고, 다른 하나는 뉴욕 필하모닉("뉴욕필")이 2011년 9/11 10주년을 추모해 연주한 2번 '부활'이다. 


이미지 출처: LA타임스


구스타보 두다멜 - LA필의 말러 5번

미국의 공영 라디오인 NPR은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 이들에게 필수 채널이다 (NPR 클래식 음악 채널). 새로 나온 클래식 음반이나 주목할 만한 공연을 소개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때로는 음반 전체, 혹은 공연 전체를 한시적이나마 일반에게 공개한다. 두다멜-LA필의 시즌 오프닝 공연도, NPR을 통해 실황으로 들을 수 있었다. 고맙다 NPR!


LA필은 사실 도시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클래식 음반 부문에서는 널리 인정 받지 못했다. 뉴욕필이나 시카고 심포니는 물론,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보다도 못하다는 인상이었다. 그래서 LA필이 2009년 에사-페카 살로넨과의 10년 동거를 끝내고 후임으로 지휘계의 록스타 급인 구스타보 두다멜을 지명했을 때, 그 의도는 더없이 명확해 보였다 (살로넨이 못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사실 나는 살로넨이 두다멜보다 더 좋다. 그의 음악적 해석도 더 마음에 든다. 그는 현재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5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 두다멜은 LA필을 그 지명도나 세간의 평가 면에서 뉴욕필이나 시카고 심포니,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반열에 올려놓았을까? 아마도. 적어도 인지도 면에서는 살로넨 시절보다 훨씬 더 높아졌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음악적 실험이나 모험에서는 살로넨에 못 미친다고 해도, 대중적 인기와 지휘자로서의 능력은 익히 인정 받은 마당이니 타당한 추측이다. 살로넨조차 두다멜에 대해 'Conducting animal'이라는 평가를 내렸을 정도이다. 오케스트라를 조련하는 이끄는 능력은 확고히 인정 받은 셈이다. 


현대 작곡가 데이비드 랭의 실험적인 음악 'Man made'를 북미 초연한 데 이어 오늘의 메인 코스인 말러 5번이 나왔다. 랭의 음악에 대한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와 환호가 디즈니 홀의 분위기를 후끈 달궈놓은 상태에서 시작된 말러 연주는 'electrifying'이라는 표현이 저절로 떠오르는 호연이었다. 몇 군데에서 약간의 불협화음이 들리고, 특히 3악장 (5악장이었나?)에서 트럼펫이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지만 - 관악기의 장점이자 단점은 귀에 너무 표나게 잘 들린다는 점이 아닐까? - 전체적인 흐름을 깰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라이브 공연'의 매력은 그런 자잘한 단점조차 어렵지 않게 묻어 버리는 '라이브'의 생동하는 분위기가 아니겠는가. 


말러는 흔히 '극단성'의 정점이라고들 한다. 극단적으로 조용하거나, 극단적으로 요란하거나, 극단적으로 부드럽거나, 극단적으로 거칠거나, 극단적으로 감상적이거나... 5번의 경우, 트럼펫 솔로로 시작하는 1악장의 장송 행진곡이 음악 전체의 분위기를 잡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무난하다는 생각이었지만 트럼펫의 리듬감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CD로 들어 익숙해진 내 취향과는 조금 벌어졌다는 뜻이다. 특별한 레퍼런스 레코딩이나 연주는 없지만, 다소 느린 템포로 연주한 존 바비롤리의 클래식 레코딩과 거칠거칠한 맛이 나는 카라얀의 레코딩을 좋아하는데, 그에 견주면 모던하면서도, 더 힘차고 빠르고 젊은 연주였다고 할까? ★★★★


현지 신문인 LA타임즈은 다음날 오프닝 콘서트를 열렬히 칭찬하는 리뷰를 실었다. 실제 현장에서 음악을 감상했다면 그 감동의 깊이와 크기가 더 깊고 컸으리라 짐작한다. 마침 밴쿠버심포니의 2014/15 시즌의 폐막 프로그램이 말러 5번이다. 그 연주는 또 어떤 느낌을 줄지 궁금하다. 내년 6월이니 아직 멀었다. 


두다멜과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의 5번 연주 맛보기. 


앨런 길버트 - 뉴욕필의 말러 2번 '부활'

정말 우연히 듣게 된 명연이다. 여러 음악을 두서 없이 듣다 보면 예외없이 말러 음악을 듣고 싶어진다. 여기에서 '여러' 음악은 비단 클래식만이 아니라 팝송이나 영화 음악, 한국의 대중가요 등도 포함된다. 말 그대로 두서 없고 장르 없이, 그 때 그 때 내키는 대로 듣는 것인데, 그런 면에서 유튜브는 그야말로 '보고'라 할 만하다. 없는 음악, 없는 연주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미흡한 화질과 음질에서 아쉬움을 느낄 때가 많지만 요즘은 그 상태도 무척 좋아져서 많은 화면이 고화질(HD)이고, 음질도 CD로 들을 때와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좋아졌다. 


유튜브의 검색 창에 'Mahler 2'를 치면 번스타인-런던 심포니의 기억할 만한 명연, 마리스 얀손스와 로열콘서트헤보의 2010년 실황, 그리고 (아마도 저작권 문제로) 지워졌다가 다른 이용자에 의해 복원된 사이먼 래틀 - 버밍엄 시립 심포니의 절창이 나온다 (래틀의 이 공연은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로 내정돼 버밍엄을 떠나면서 펼친 고별 공연이다. EMI 음반으로 나온 버밍엄 시립 심포니의 연주 못지 않게 좋다. 음반의 메조소프라노 솔로이스트는 전설의 재닛 베이커, 이 유튜브 음반은 안네-소피 폰 오터다. 전문가들은 베이커가 낫다고들 하지만 내겐 오터도 좋기만 하다.) 


아무튼 다 몇 번씩 듣고 본 공연들이라, 새로운 연주가 없을까 해서 좀더 아래로 내려갔더니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가 있는게 아닌가! 게다가 지휘자가 로린 마젤이 아니라 앨런 길버트다. 로린 마젤이 타계 직전 뉴욕 필을 지휘해 공연한 말러 사이클은, 내게는 그저 그랬다. 타성에 젖은,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연주라는 생각... 내 편견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앨런 길버트에 대해서는 기대가 컸다. 그가 뉴욕필로 오기 전에 스웨덴의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한 말러 9번 (비스)은 비평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옆에 소개한 링크를 통해 직접 감상할 수 있다).


유튜브의 화질이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이거 저작권에 걸릴텐데...싶으면서도 잘 감상했다. 중간중간에 화면이 끊겨서 불편했는데, 아마 온라인 음악 사이트인 ARTE에 공개되었을 때 이를 곧바로 복사하는 과정에서 네트워크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이미지 출처: 뉴욕 필하모닉


링컨 센터에서 열린 연주는 '최선을 다한 연주', '혼을 담은 연주'라는 느낌이 선연하게 다가올 정도로 빼어났다. 링컨 센터 밖에도 대형 화면과 좌석을 설치해 더 많은 이들이 감상할 수 있게 했다. 그런 장면뿐 아니라, 'New York Forever'라는, 화면 한쪽의 메시지에서, 예사로 벌어지는 이벤트는 아니다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2011년 9월11일에 열린, 9/11 10주년 추모 콘서트였다. 뉴욕이여, 9/11의 비극을 딛고 부활하라!...


앨런 길버트는, 두다멜과 견주면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스타 파워도 약하고 (뉴욕필이라는 초대형 프랜차이즈를 이끌면서도), 지휘 스타일도 두다멜처럼 화려하거나 역동적이지도 않은 듯하고, 곡 해석도 대체로 모험적인 쪽보다는 안전하고 평이한 쪽을 택하는 듯하다 (아닌데, 그의 차분한 동양인의 외모 떄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적어도 이 연주에서만은 그렇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모든 음악이, 음표 하나하나가 그의 손끝에서, 표정에서, 눈빛에서 나오는 듯했다. 음악의 메시지가 그의 전신을 통해 오케스트라로 전파되고 청중들로 전염되는 듯했다. 특히 피날레의 절정에서 그가 보여준 몸짓은 문득 번스타인의 현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혼신을 다한 연주. 몇 번이고 다시 감상하고 싶은, 진정성 가득한 공연이었다. 


어느 지휘자/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악을 듣든 말러의 음악은, 내 경우 특히 2번과 3번은,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고, 머리 끝으로 피가 솟고, 코끝이 시큰하면서 눈물이 나려고 한다. 2번과 3번의 마지막 악장은 언제 들어도 정말 눈물겹도록 장엄하고 아름답다. 2번을 들을 때는 '신의 존재'를 믿고 싶어지고, 3번을 들을 때는 무한의 우주 속으로 하염없이 유영하는 듯 황홀한 느낌을 받는다. 하물며 뉴욕필/앨런 길버트의 이번 연주처럼 그 밀도가 더 높게 느껴지는 경우에랴!


이 글을 쓰다가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뉴욕필 웹사이트에서도 전곡을 감상할 수 있지만 영상은 없고 음질도 떨어진다. 하지만 감상하는 데 부족함은 없다. 유튜브 파일로는 여기에서 감상할 수 있는데, 저작권 문제로 언제 어느 때 지워질지 알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