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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리처 시리즈 No. 19 - 퍼스널 (Personal)


리 차일드의 '잭 리처' 시리즈 제19권째. 리처 시리즈 중에서도 완성도가 가장 높은 작품 중 하나로 꼽을 만하다는 생각이다. ★★★★☆


누군가 프랑스의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으나 방탄 유리 - 사실은 특수 재질의 방탄 플라스틱 - 때문에 실패한다. 그러나 저격 거리가 1.2 km나 되고, 방탄 설비가 아니었다면 정확히 대통령을 저격할 수 있었다는 점 때문에 그만한 실력을 갖춘 저격수는 미국과 영국, 러시아의 전직 저격수 세 명으로 압축된다. 이들이 - 혹은 이들 중 한 명, 혹은 두 명이 - 영국에서 개최되는 G8 정상 회담에서 암살극을 벌일 공산이 크다고 판단한 미국의 첩보 기관은 잭 리처를 스카우트 한다. 여기에는 미국측 용의자로 꼽히는 저격수가 잭 리처가 헌병으로 근무할 때 체포해 15년형을 안긴 인물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소설 제목 'Personal'은 여기에서 나온다). 


잭 리처 시리즈를 읽는 재미는 다층적이다. 하나는 슈퍼맨을 방불케 하는 리처의 초인적 능력이 독자로 하여금 '리처는 천하무적'이라는 신뢰와 안도감을 안겨준다는 점이다. 작은 여행가방이나 지갑조차 없이, 휴대용 치솔 하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리처는 심지어 옷도 두 번 입지 않는다. 갈아 입을 때가 되면 싸구려 할인 매장에 들러 몸에 맞는 옷을 구입해 입고, 헌옷은 그 자리에서 버려 버린다. 버스나 히치하이킹으로, 바람 부는 대로, 구름 흐르는 대로 떠돌면서 진정한 자유인의 삶을 산다. 


리 차일드의 신간은 도서관에서 빌려보기 어렵다. 미리미리 찜해 놓아도 열몇 번째로 밀린다. 상대적으로 인기가 덜한 판본이 시력이 안좋은 사람들을 배려한 'Large print'판인데, 운좋게 나온 지 며칠 만에 내 차례가 와사 읽어볼 수 있었다.


2미터에 가까운 거한이지만 뛰어난 판단력과 추리력만큼이나 몸도 날래고, 네 명 정도는 별 문제없이 상대하며, 1 대 1 싸움에서는 져본 적이 없다. 총 솜씨도 저격수 못지않게 뛰어나고, 수학과 물리학, 논리학에 밝으며, 무엇보다 정의감이 투철하다. 하지만 맺고 끊는 게 비정할 만큼 분명해서, 기존 형법/사법 체계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경우에는 스스로 법의 심판자를 자처해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는다. 선과 악에 대한 그의 시각은 놀라울 만큼 단순하고 명확하다. 


리처 시리즈를 읽는 또 다른 재미는 리 차일드의 스타카토식 문체이다. 세상을 달관한 듯한 시선과 세계관을, 일도양단식 단문들로 가볍고 날렵하게 실어 나르는데, 그런 문장을 읽는 재미가 여간 아니다. 또 리처의 말을 통해 소개되는 - 아니, 과시되는 - 다양한 총기류에 대한 리 차일드의 박물학적 지식도 흥미롭기 그지없다. 


리처 시리즈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한 가지 요소는 리처가 워낙 천하무적이어서 그가 곤경에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인데, 리 차일드는 그런 위험 아닌 위험을, 리처가 어떤 판단과 논리로 그런 곤경을 미연에 읽어내고 예방하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그리고 매 시리즈에서 리처가 만나는 주변 인물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적절히 보완한다. 


다른 리처 시리즈에 대한 독후감을 쓰면서도 언급했지만, 리처 시리즈가 많은 팬을 거느린 배경에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가진 꿈과 낭만을 리처가 대리 만족시켜준다는 점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리처는 어느 장소에도, 어느 특정 인물이나 관계에도 매여 있지 않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미국 곳곳을 떠돈다. 돈이 떨어지면 이러저러한 잡일로 생활비를 벌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가 가는 곳마다 벌어지곤 하는 - 아니 벌어져야 하는 - 여러 범죄나 위기 상황이 그의 경제적 문제를 덤으로 해결해준다. 그는 말을 타지 않았고, 허리에 총만 차지 않았다 뿐이지, 미국 서부극이 그려 보였던 와일드웨스트(Wild West)의 로망, 론 레인저 (Lone Ranger)의 현대식 구현이다. 또 어떤 곤경과 막강한 적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통쾌하게 정의를 구현하는 리처의 초인적 능력은, 독자들로 하여금 언제나 부와 권력을 쥔 사람과 집단에 의해 휘둘리는 현실의 부조리를 잠시 잊게 만들어주는 일종의 마약이다. 


'퍼스널'은 리처의 과거사를 양념처럼 들춰 보이면서, 또 언제 어느 방향에서든 저격수의 총알이 날아올 수 있다는 위기감을 계속 느끼게 하면서, 리처보다 신체적으로 더 강할 듯한 괴물을 등장시켜 1 대 1 대결의 기대를 한껏 부추기면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뜻하지 않은 반전의 매력까지 안겨주면서, 산뜻하게 끝맺음하는 작품이다. 그 재미와 완성도 면에서, 20권 가까운 리처 시리즈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만한 가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