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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사이클링

발가락 모자

살다 보니 이런 것도 해본다. 아니, '살다 보니'가 아니라 '뛰다 보니'인가? 


왼쪽 엄지 발톱 밑에 까만 멍이 들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노쓰밴쿠버로 이사 오고 나서, 주로 언덕을 자주 오르 내리면서, 특히 내려갈 때 발가락 끝이 신발과 자주 접촉하면서 멍이 생기지 않았을까? 어쨌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시간이 지나면 멍도 지워지겠지. 


그런데 웬걸, 어제 우연히 엄지 발톱이 빠지기 직전인 걸 알았다. 거의 95% 쯤이 떨어져 있었다. 아직 새 발톱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일삼아 떼어내면 뛰는 것은 물론 그냥 걷기에도 불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임시변통 삼아 테이프로 발가락을 감았다. 


점심 시간을 이용해 근처 스포츠용품점 ('Running Room'이라고 달리기 전용 매장이다)을 찾았다. 발가락이 빠지려고 하는데.... 하자 매점 직원은 "아하! " 하면서 대뜸 작은 박스 하나를 건넨다. 이름이 토우 캡, 발가락 모자다. 그 모자 - 아니면 장갑? - 가 달랑 네 개 들었는데 값이 무려 15달러다. 이런 바가지가...?!


어쨌든 장만했다. 당장 다다음 주에는 스코시아 뱅크가 후원하는 하프 마라톤을 뛰어야 하고 (물론 누가 뛰라고 등 떠미는 것도 전혀 아니지만), 무엇보다 다시 달리기를 재개해야 하니까, 그리고 새 발톱이 나올 때까지 어떤 식으로든 발가락을 보호해야 하니까 꼭 필요할 듯했다.


지난 일요일의 하프 마라톤을 좀 무리한 것인지, 아니면 달리기에 자전거 훈련/출퇴근을 갑자기 부가해 몸이 사단이 난 것인지 양쪽 허벅지에서 비상 신호가 왔다 (매일 자전거로 오간 거리를, 난이도를 감안해 계산하면 평균 8마일 정도씩을 뛴 셈이었다. 그러니 매일 적어도 12-14마일씩 달렸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번 주는 내내 쉬고 있다. 하프 마라톤을 뛴 경우에도 최선을 다했다면 적어도 일주일은 쉬어야 한다는 마라톤 지침서를 떠올리며 위안을 삼으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치 않다.


달리기에 빠지면 - 꼭 달리기뿐이랴, 아마 사이클링이나 수영, 요가 등도 비슷할 게다 - 누가 뭐라지도 않는데 혼자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못미쳐 안달복달 하고, 혼자 규칙을 정해놓고 그것을 못지켜 스스로 죄책감에 빠진다. 


외부의 누가 뭐라고 하는 것보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달달 볶을 때 더 견디기 힘들다. 이것을 습관이라고 해야 할지, 집착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병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사실이다. 뭔가 중요한 걸 하나 빼먹고 다니는 듯한 느낌...


이번 주는 버스를 타고 통근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괜히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황당한 생각이 문득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자전거를 탔어야 하는데... 왜? 누가 그러라고 하니? 오히려 편히 앉아 책 읽을 시간도 나고 좋잖아! 그래도...


사람의 마음이란 참 요지경이다. 아니, 내 마음만 그런가? 이것저것 새롭게 시도하는데 몸이 거기에 잘 적응하는 데 재미를 붙여서, 혹은 놀랍고 신기해서 자꾸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밀어부치는 데 중독이 된 것일까? 아니면, 이런 달리기의 재미가, 혹은 이런 사이클링의 재미가 있는 걸 이제야 알았고나, 하는 때늦은 깨달음 때문일까?


아무려나, 살다 보니 별별 재미난 체험을 다 해본다. 발에 모자/장갑도 씌워보고...하하. 발톱이 완전히 빠진 다음에도 이 모자를 쓰면 뛰는 데 별 지장이 없으려는지... 제발 그러기를!


토우 캡은 말랑말랑 젤을 만지는 듯한 느낌이다. 잘 늘어나서 위 포장지에 쓰인 것처럼 '한 가지 크기지만 대부분의(most) 발에 맞을 것 같다. 집에 오자마자 테이프를 풀고 하나를 씌워봤는데, 괜찮은 것 같다. 문제는 실제로 달리기를 할 때도 없어진 발톱 몫을 조금이나마 해줄까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