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우연히 발견한 보석 같은 영화 'Liberal Arts.' 주인공이 옛 대학 은사의 은퇴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주인공 제씨 피셔 역을 맡은 조쉬 래드너가 각본을 쓰고 감독까지 했다 (참 재능도 많지...). 영화 촬영 장소인 케년 칼리지(아래 사진)는 오하이오 주 갬비어 (Gambier)에 있는 소규모 명문 문과대학으로 래드너의 실제 모교이다. 제씨가 가장 감명 받은 교수로 지목하는 극중 문학 교수 역의 앨리슨 재니도 케년 칼리지를 나왔다.
이 영화가 특히 내 마음을 끈 것은 지적이면서도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대사들이었다. 그리고 대학 캠퍼스의 젊은 분위기, 그 캠퍼스를 채운 학생들의 에너지, 그리고 비관적인 듯한 포즈 속에서도 끝내 숨길 수 없는 긍정과 낙관의 분위기였다. 주인공을 맡은 래드너와 엘리자베스 올슨의 강렬한 화학 반응 - 이라고 하니까 무척 어색하게 들린다. '케미스트리'라고 하면 느낌이 확 오는데... - 이 무엇보다 좋았고, 베테랑 배우 리처드 젠킨스 (피터 호버그 교수 역), 아이돌 스타에서 '좋은 배우'로 커가는 자크 에프론의 감초 연기도 눈길을 끌었다. 아래는 특히 인상적이었던 대사들.
Prof. Peter Hoberg: Any place you don't leave is a prison.
피터 호버그 교수: 어느 장소든 자네가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는 데가 감옥이야.
Prof. Peter Hoberg: You know how old I am?
Jesse Fisher: No, how old are you?
Prof. Peter Hoberg: It's none of your goddamn business. Do
you know how old I feel like I am?
Jesse Fisher: [shrugs]
Prof. Peter Hoberg: 19. Since I was 19, I have never felt
not 19. But I shave my face, and I look in the mirror, and I'm forced to say,
"This is not a 19-year-old staring back at me."
[sighs]
Prof. Peter Hoberg: Teaching here all these years, I've had
to be very clear with myself, that even when I'm surrounded by 19-year-olds,
and I may have felt 19, I'm not 19 anymore. You follow me?
Jesse Fisher: Yeah.
Prof. Peter Hoberg: Nobody feels like an adult. It's the
world's dirty secret.
피터 호버그 교수: 자네 내가 몇 살인지 알아? 제씨: 아뇨, 어떻게 되시죠?
호버그 교수: 그건 자네가 알 필요 없는 거고, 내가 몇 살처럼 느끼는지 아나?
제씨: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호버그 교수: 열 아홉이야. 열 아홉 살이 된 이후 열 아홉 살이 아니라고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어. 하지만 면도를 하고 거울을 볼 때마다 혼자 되뇌곤 하지. '나를 바라보는 이 얼굴은 열 아홉일 수가 없어.' (한숨) 이 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나는 스스로에게 분명히할 수 밖에 없었지. 수많은 열아홉 살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도, 그리고 스스로 열 아홉 살인 것처럼 느낄 때도, 나는 더 이상 열 아홉 살이 아니라는 걸. 무슨 말인지 알겠나?
제씨: 예.
호버그 교수: 스스로 성인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세상의 공공연한 비밀이지.
Zibby: So, what was your major?
Jesse Fisher: I was English, with a minor in history, just
to make sure I was fully unemployable.
지비 ('엘리자베스'의 애칭): 대학 때 전공이 뭐였어요?
제시: 영문학에 역사학을 부전공으로 들었어요. 취업이 안되려고 작심을 한 거죠.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애칭은 정말 많다. 리즈, 일라이자, 라이자, 베스...이 영화에서 '지비'를 만났다. 귀엽게 들렸다. 엘리자베스 올슨과 완벽하게 잘 어울렸다. 연기보다 가십의 주인공으로 더 유명한 언니 쌍둥이 애슐리 올슨과 메리-케이트 올슨은 싫어하지만, 엘리자베스 올슨은 정말 마음에 든다. 명민하면서도 당돌하고 귀여운 외모가 퍽 매력적인데 연기력 또한 나무랄 데가 없다.
Jesse Fisher: You know, he said the purpose of fiction was
to combat loneliness.
Dean: That's good. I never heard that.
Jesse Fisher: Yeah. Well, on the other hand, spending most
of your time with an 1,100-page book tends to put a dent in your social life.
Dean: Yeah. Loneliness simultaneously increased and
decreased.
제씨: 너도 알겠지만, 소설의 목적은 외로움과 싸우기 위한 것이라고 그는 말했지.
딘: 그럴듯한 말인데요?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한 줄은 몰랐어요.
제씨: 그래, 하긴 달리 생각해 보면, 1,100페이지짜리 책을 읽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쏟는데 사교 생활에 흠집이 나지 않을 리가 없겠지.
딘: 그렇죠. 외로움은 동시에 늘고 줄죠.
(여기에서 이들이 화제로 삼은 소설가는 46세에 자살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이고, 1,100페이지 책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Infinite Jest'이다. '무한 농담'쯤으로 번역될 수 있을까?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월리스는 현재 미국의 대표적 중견 작가 중 한 사람인 조너선 프랜즌의 절친이기도 했다.)
Jesse Fisher: The other day I was crossing the street, lost
in my head about something - a not uncommon state of affairs. I was listening
to the overture and as the music began to swell I suddenly realized that: I had
hands. And legs, and a torso, and that I was surrounded by people and cars.
It's hard to explain exactly what happened, but I felt in that moment that the
divine - however we may choose to define such a thing - surely dwells as much
in the concrete and taxi cabs as it does in the rivers, lakes, and mountains.
Grace, I realized, is neither time nor place dependent. All we need is the
right soundtrack.
제씨: (지비에게 보낸 편지 중) 며칠전 거리를 건너다 무엇인가에 정신이 팔린 적이 있었어. 드문 일은 아니지.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을 듣고 있었는데, 음악이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하면서 나는 문득, 내게 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그리고 다리와 몸통도, 그리고 내가 수많은 사람들과 자동차들에 둘러싸인 사실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그 순간에 신성성 - 그게 무엇이라고 어떻게 정의하든 - 이 강과 호수, 산이 그런 것처럼 콘크리트와 택시에도 분명히 깃들어 있다고 느꼈어. 신의 은총은 시간이나 장소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 필요한 것은 적절한 음악일 뿐이라고.
제씨가
지비와, 일부러 이메일이나 온라인 수단 대신 고전적인 편지를 통해 교유하는 장면 중 하나인데,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한
대목이기도 하다. 제씨는 지비가 녹음해준 클래식 음악 CD를 들으면서 신성성을 발견하고 신의 은총을 느낀다. 제씨의 편지가 낭송되는 동안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 5번 중 2악장, 마스네의 명상곡,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비발디, 바그너 등이 흐른다. 좋다. 누군가 그 대목만 유튜브로 옮겨 놓았다.
Zibby: I sometimes feel like I'm looking down on myself.
Like there's this older, wiser me watching over this 19-year-old rough draft,
who's full of all this potential, but has to live more to catch up with that
other self somehow. And, uh, I know I'll get there. It's just sometimes I think
I want to rush the process, you know? And I don't know, maybe, um - maybe I
thought you were some sort of shortcut. Does that make any sense?
Jesse Fisher: If I wrote you, I would be like, "This is
the best rough draft ever."
지비: 내가 나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나보다 더 나이들고 현명한 내가, 잠재력은 충만하지만 그 다른 내가 되기까지는 좀더 살아야 하는, 아직 열아홉 살의 초고 (草稿)를 지켜보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음, 언젠가 그렇게 될 거예요. 그냥 가끔은, 그 과정이 좀더 빨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잘 모르겠어요, 아마, 음, 어쩌면 그 쪽이 일종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말이 되나요?
제씨: 네가 내가 쓴 초고라면, 나는 "이건 내가 쓴 최고의 초고"라고 감탄했을 거야.
열아홉 살 청춘을 원고 '초고'에 비유한 대목이 참 좋았다.
Ana: I love books. I do in, like, the dorkiest way possible.
Jesse Fisher: Oh, me too. It's a problem.
Ana: Like, I love trees cause they give us books.
Jesse Fisher: super cool of the trees to do that, Right?
Ana: I'm actually... this is weird. I'm actually trying to
read less.
Jesse Fisher: Why?
Ana: I felt like I wasn't watching enough television. No, l
just started to feel like reading about life was taking time away from actually
living life, so I'm trying to, like, accept invitations to things, say
"hi" to the world a little more.
Jesse Fisher: That sounds scary. It's going well?
Ana: It's... okay. I keep thinking I'd be so much happier in
bed with a book, and that makes me feel not super cool. I still read tons. I
just feel like I'm more aware of a book's limitations. Does that make sense?
Jesse Fisher: Yeah, totally.
애나: 나는 책이 정말 좋아요. 그보다 더 엉뚱할 수 없는 방식으로요.
제씨: 아, 나도 그래요. 그게 문제죠.
애나: 이를테면 전 나무가 좋은데 그것도 나무가 책을 만들어주기 때문이에요.
제씨: 나무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게 정말 쿨하죠?
애나: 전 사실...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전 사실 책을 덜 읽으려고 노력해요.
제씨: 왜요?
애나: 전 TV를 너무 안보는 것 같아요. 아니, 삶에 관한 책을 읽는 게 오히려 실제 삶을 살 시간을 빼앗고 있다고 느껴서, 그래서 세상 속으로 조금 더 다가가고, 현실 잡사의 초대들에 응하려고 애쓰는 거죠.
제씨: 좀 으시시한데요. 잘 되고 있나요?
애나: 그럭저럭.... 침대에서 책을 읽는 편이 훨씬 더 행복하겠다고 계속 생각하다 보니 그렇게 노력하는 게 별로라고 느껴져요. 그래도 여전히 엄청 읽어대고 있어요. 그냥 나한테 주어진 한계 독서량을 좀더 분명히 인지하게 됐달까...말이 되나요?
제씨: 그럼요, 말이 되고 말고요.
(애나는 제씨가 단골로 들르는 서점의 주인이다. 둘은 서로 눈빛만 나누고, 점원과 고객의 사이로 만나다 영화 후반에 서로 대화를 튼다.)
Jesse Fisher: Don't be a genius who dies young. Be one who
dies old. Being old is cool. Grow old, and die old. It's a better arc.
제씨: (자살을 기도했다 제씨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한 외로운 대학생 '딘'에게) 요절한 천재가 되지 말아. 나이 들어서 죽는 사람이 돼. 나이를 먹는다는 건 쿨한 일이야. 순순히 나이를 먹고, 나이를 먹어서 죽으라고. 그게 더 나은 인생의 궤적이야.
사족: 영화에서 'the purpose of fiction is to combat loneliness'라는 표현을 듣고, 문득 아내와 나도 - 특히 아내가 - 혹시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한국의 교유 관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심심하고 헐렁하고 결핍된 인간 관계로 살아가는 캐나다에서, 책 읽기가 그런 수단은 아니었을까?
그러냐고 아내에게 물으니, 뭐 그럴지도...라고 순순히 수긍한다.
내게 외로움과 싸우는 수단은, 혹시 달리기가 아니었을까? 그렇든 그렇지 않든, 한국에 살고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덜 책을 읽고, 지금보다 훨씬 덜 달리고, 지금보다 훨씬 더 술을 마시고, 지금보다 훨씬 더 자주 친구들을 만나 회포를 풀었을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