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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비 내리는 밴쿠버에 오다

리치몬드의 밴쿠버 국제공항으로 내려앉기 시작하는 웨스트젯.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고, 간혹 거센 바람이 불어 기체를 불안정하게 만들기도 했다.


9월29일/ 일/ 흐림, 비 약간


밴쿠버행 웨스트젯에 앉아 있다. 태평양 시간으로 오전 10시44분, 산악 시간대로는 11시44분, 점심 때다. 머리속이 멍하다. 내일부터 새 직장에 출근이다. 하지만 별다른 실감은 없다. 아직은 얼떨떨할 따름이다.


공항으로 오는 미니 밴 안에서, 성준이는 아빠만 밴쿠버에 가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앙~ 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자기도 같이 가면 안되겠느냐고 묻는다. 다음 주 목요일에 다시 볼 거라고 하자 금방 진정이 된다. 엄마 컴퓨터로 라퓨타에 나오는 로봇을 볼 수 있느냐고 또 묻는다. 안된다고, 아빠 컴퓨터로만 된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목요일에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물론 보여주겠다고 말하자 금방 예의 까불이로 돌아간다. 



문득, 4년전 토론토와 에드먼튼을 오가던 때가 떠올랐다. 2009년 1월, 삭풍 몰아치던 한겨울에 나 먼저 에드먼튼으로 날아왔고, 아내와 아이들은 이듬해 초여름까지 토론토에 남아 있을 때였다. 가능하면 자주 토론토로 날아가 가족의 얼굴을 보고자 했지만 한 달에 두 번 이상 날아가기 어려웠다. 비행기로 4시간 가까이 날아가야 하는 거리도 거리였고, 만만찮은 비행기삯도 큰 걸림돌이었다. 그 시절, 아빠가 다시 에드먼튼으로 갈 무렵만 되면 성준이는 늘 울었다. 아내가 성준이를 ‘mama’s boy’가 아닌 ‘papa’s boy’라고 농반진반으로 지적한 이유였다. 아빠가 어디 갈까봐 내 곁에만 붙어 있었지만, 토론토 국제공항으로 오는 차 안에서 늘 잠드는 바람에 아빠를 놓치곤 했다. 그 때 성준이가 겨우 두 살 남짓이었으니 어떻게 밀려오는 졸음을 참을 수 있었으랴! 아빠가 떠나간 걸 뒤늦게 안 뒤에 성준이는 또 앙앙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여서, 어느날 참다 못한 아내는 내게 전화를 걸어 아이 우는 소리만 들려주며 자신이 감당해야 할 스트레스를 대리 체험하게 해주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렇게 오래 떨어져 있지 않겠다고 진작부터 다짐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바꿔 말하면 그 때까지 밴쿠버에서 살 집을 찾든 못찾든, 새알밭 우리집의 새주인에게 열쇠를 건네주는 10월25일에는 무조건 밴쿠버로 달려올 계획이다. 가족과 몇 달씩 떨어져 생활하는 일이, 사람으로서 차마 할 짓이 못된다는 점을 저리게 실감한 까닭이다. 그러니 당장의 목표는 밴쿠버 – 정확하게는 ‘노스 밴쿠버’ – 에서 가능한 한 빨리, 그러나 오래 살아도 후회하지 않을, 그런 집을 찾아 계약하는 일이다. 


낮게 내려앉은 구름과 바다, 그 사이로 검은 선처럼 이어진 섬들. 비행기가 공항으로 막 내려앉는 순간이다. 날씨가 맑았더라면 퍽 장관이었을텐데, 오늘은 시계도 좋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일정이 퍽이나 빡빡하다. 이번 목요일(10월3일) 아침,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나흘 일정으로 밴쿠버로 날아온다. 미리 찍어둔 집들 몇 곳을 직접 둘러보기 위해서다. 다행히 사진으로 본 것만큼 실물도 만족스럽고 주변 분위기도 마음에 든다면 그 집을 사겠다는 심산이다.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간 집을 둘러보고 살 집 – 여기에서 ‘살’은 ‘live’와 ‘buy’를 다 뜻한다 – 을 정하겠다는 생각은 번갯불에 콩을 볶아보겠다는 야심만큼이나 급하고 무리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달리 대안이 없다. 새알밭 집을 나 혼자 보고 계약한 다음에, 아내는 못내 아쉬워했다. 특히 낡고 불편한 부엌에 불만이 많았다. 따지고 보면 주부가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곳이 부엌인데, 정작 나는 그 부엌을 꼼꼼히 따져볼 생각을 못했다. 설령 그런 시도를 했더라도 미흡했겠지만… 그래서 무리인 줄 알면서도 이번에는 아내더러 직접 보고 고르라고 했다. 나는 물론 우리집 ‘넘버 원’의 선택을 100% 존중할 것이고, 아무런 불만 없이 따를 생각이다. 


당분간 처가가 있는 써리(Surrey)에서 밴쿠버 다운타운까지 통근할 계획이다. 구글이 예상한 통근 소요 시간은 한 시간 남짓. 그러나 실제로는 그보다 덜 걸릴 것으로 기대한다. 위 사진은 써리에서 가장 큰 쇼핑 단지 중 하나인 길포드 타운센터다. 짐을 싸면서 구두를 넣지 않아 'Payless Shoes'에서 그럴듯해 보이는 구두를 55달러에 샀다. 여기에서 '그럴듯해 보인다'는 것은 실은 그럴듯하지 못하다, 몰개성적이다, 눈에 띄지 않는다, 그냥 구두 같다...라는 뜻이다. 또 일주일치 간식거리도 샀다. 바나나, 사과, 요거트 그런 것들... 월마트 식료품점에서 샀는데, 사람들 사이에 치여 죽는 줄 알았다. 에드먼튼과 견주면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참, 넥타이도 그만 빠뜨렸는데, 장인 어른의 것을 빌려쓰려고 보니 다 어둠침침하다. 그 중 그나마 좀 밝아보이는 것을 일단 메고, 내일 다운타운에서 밝은 빛깔로 한두 개 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