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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로봇 사랑'도 대물림?

레고를 이용한 성준이의 로봇 제작 기술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이 사진 속의 로봇은 영화 'Pacific Rim'을 아직 알기 전에 만든 것이다.


개그콘서트의 '거제도' 코너에 보면 신보라와 정태호가 서울 아저씨 - 때로는 우체부 아저씨 -가 한 말을 중얼중얼, 열심히 반복 학습하는 장면이 있다. 요즘 성준이가 그렇다. 


"I want Gypsy Danger, but it won't be available on my birthday, because the movie Pacific Rim will not open until July, but once the toy robot is available, daddy and mommy will buy it for me..."


토씨까지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대충 저런 말을 혼자 식탁이나 책상 앞에 앉아서 중얼중얼 읊조린다. 물론 독백은 아니다. 엄마나 아빠가 들을 만한 거리에 있을 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자기에게 로봇 사주는 걸 잊지 말라고 엄마 아빠에게 단도리하는 자신만의 방편인 셈이다. 


성준이의 성화로 아빠가 그려준 그림(왼쪽). 오른쪽은 집시 데인저를 성준이가 레고로 만든 것 (가슴 부분의 제트엔진 (아니면 무기?)을 맥주병뚜껑으로 표현한 게 기특하다.


성준이를 보면서 피는 속이지 못하겠다, 유전자가 무섭다, 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자식 가진 부모라면 다 비슷한 생각을 종종 하겠지만, 때로는 '이런 것까지?' 하고 놀랄 만한 대목을 보게 돼서, 이 정도는 아니어도 되는데, 라는 약간의 걱정도 들곤 한다. 


성준인 뭔가 하나에 꽂히면 다른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혹은 무시해 버린다. 옵티머스 프라임, 범블비 같은 트랜스포머즈 로봇들에 꽂혔을 때는 다른 어떤 소재나 주제, 내용도 다 아니올씨다다. '밥 더 빌더'에 꽂히면 그것만 주구장창 보고 또 보고, '토마스와 친구들', '맥스와 루비', '숀 더 쉽', '도라', '탱탱' 등도 마찬가지다. 일단 이거다 싶으면 마치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그것 하나만 파고 또 판다. 물이 마를 때까지 퍼내고 또 퍼낸다. 다른 걸 보라고 해도, 보는 시늉만 잠시 하다가는 다시 돌아간다.


집 앞마당에 성준이가 그려놓은 그림. 왼쪽은 미국산 '집시 데인저', 오른쪽은 중국산 '크림슨 타이푼(태풍).'


한 가지 일관된 흐름은 '로봇'을 무던히도 좋아한다는 점이다. 거의 집착이고 중독에 가깝다. 요즘 눈 뜨면 가장 먼저 하는 말이 '퍼시픽 림' (환태평양, 7월12일 개봉하는 거대로봇 영화)이고 집시 데인저고, 코요테 탱고, 스트라이커 유레카다 (그 영화에 등장하는 로봇 이름들이다).  외우기 쉽지 않아보이는 로봇 다섯 대의 이름을 다 외웠고, 이제는 각 로봇의 파워와 스피드, 장착 무기 수준까지 꿰게 됐다. 물론 여기에는 그런 정보와 그림을 뽑아다 제공한 아빠 책임도 크다. 


성준이가 그린 로봇 그림들. 그 중 넉장을 나란히 배열했다.


내가 그랬다. 초등학교 때 얼마나 로봇을 좋아했는지 모른다. 마징가Z, 그레이트마징가, 그랜다이저, 로보트 태권V...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지만 마징가Z 할 때만 되면 저녁도 마다고 뒷집에 다짜고짜 쳐들어가 TV를 봤다 (그걸 너그러이 받아주신 그 이웃 어른들께 고마울 따름이다). 집에 돌아다니는 빈 종이란 종이는 다 로봇 그림들로 채웠다. 지금도 그때 기억으로 로봇 몇 대는 어렵지 않게 슥슥 그려낼 수 있다. 물론 품질은 책임지지 못하지만... 아버지의 중요한 장부에까지 로봇 그림을 그려서 혼난 적도 많았다.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는 20페이지쯤 되는 공책에 로봇 만화를 창작하기도 했다 (친구에게 그냥 줬던가, 돈 받고 팔았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잘 간직할걸, 하고 가끔 후회하곤 한다). 


누구나 그렇듯 내 어렸을 적 꿈은 로봇 조종사가 되어 지구를 정복하려는 악당을 물리치는 것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조종사 꿈은 로봇을 설계하는 과학자로 바뀌었다가, 시나브로 그 꿈을 포기한/잊은/바꾼 것 같다. 하지만 로봇에 대한 열병과도 같은 관심으로 상상의 세계를 채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집에 있는 철인28호 모형(오른쪽)은 그런 내 꿈의 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내의 핀잔을 무릅쓰고, 몇년 전에 온라인으로 샀다). 


성준이가 꼭 그 모양이다. 로봇 로봇 로봇... 종이마다 로봇을 그렸고, 집 앞마당에도 로봇을 그려놓았다. 도서관에 가도 로봇이 나오는 책만 빌리려 한다. 어느날은 집시 데인저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철인28호 모델을 만지작거리길래 "그거 너 줄까?" 했더니, 행여나 그 로봇으로 집시 데인저 선물을 대신하고 입닦을까봐 겁이 났는지 "No, I don't want it, I want Gypsy Danger robot!"이라고 말하며 잽싸게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그 로봇을 가져도 사줄테니까 걱정하지 마. 가질래?" 하고 물어도, 역시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하다. 대답도 여전히 'No'다. 


성준이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지,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 나와 아내는 알지 못하고, 또 알고 싶지도 않다. 무엇이 되라고 강요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무엇을 하든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초등학교도 모자라 유치원 시절부터 애를 잡아대는, 아니, 잡을 수밖에 없는 환경인,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지 않는 것을 다행스러워 한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어떻게든 지지하고 후원해줄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의 Big Brother 동준이와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면 더더욱...



그리고 성준이에게 보여준 - 물론 나도 함께 감상한 - 영화 'Pacific Rim'의 예고편. 이 비디오에 나오는, 로봇이 괴물에게 달려가는 장면을 하루에도 몇 번씩 흉내내며 집안을 뛰어다닌다. 이 예고편은 몇 번이나 봤는지 일일이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 '13세 이상 부모 동반 입장가' (PG-13)로 등급이 매겨져 있지만 이렇게 좋아하니 직접 영화관에도 데려가볼까 고민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