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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데뷔: 'A Killing in the Hills'


웨스트 버지니아 중의 가난한 소읍 '애커스 갭' (Acker's Gap)은 어느 집에 숟가락이 몇 개나 있는지, 어젯밤에 누가 부부싸움을 했는지, 뉘집 애가 사고를 쳤는지, 모두가 모두를 훤히 아는 그런 동네다. 어느날 이 동네의 로컬 레스토랑 '솔티 도그'(Salty Dawg)에서 70-80 대의 동네 노인 세 명이 머리에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주말이면 매일 모여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곤 하던 노인들이었다. 은퇴한 지 10년이 넘어 다른 이의 원한을 살 만한 일에 연루되거나, 비즈니스 상의 갈등을 촉발했을 가능성도 없는 동네 원로들이었다. 대체 왜 이들은 그처럼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야만 했을까?


누군가가 레스토랑으로 들어와 세 노인을 차례차례 처형하듯 살해했지만, 정작 그 안에 있던 손님들 중 살인범을 목격했거나, 그가 어떤 차로 왔다 갔는지, 아니면 도보로 왔다 갔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흑인인지 백인인지, 장년인지 10대인지도 오리무중이었다. 다들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태에 다만 망연자실, 충격에 빠져서 바로 눈앞에서 펼쳐진 상황을 미처 인지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목격자 아닌 목격자 중 한 사람은 애커스 갭이 속한 '레이튠 카운티'의 지방검사인 벨파 ("벨") 엘킨스의 딸인 칼라도 있었다. 그리고 뒤에 밝혀지지만 칼라는 살인범을 똑똑히 보았고, 그가 누구인지 기억하고 있었지만 현장의 충격 때문에 미처 정신을 수습하지 못해 경찰에 도움을 줄 만한 아무런 증언도 제공하지 못한다.


민완 기자인 줄리아 켈러의 데뷔 추리/범죄 소설 'A Killing in the Hills'를 읽었다. 바로 직전에 읽은 'Rage against the dying' (독후감은 여기) 만큼이나 인상깊고 흥미롭게 읽었다. 무엇보다 배경이 된 지역이 대도시가 아닌 작은 마을이라는 점에서 끌렸고, 그 작은 마을의 이미지와 마을 주민들의 생활상이 꼼꼼하고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묘사되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추리/범죄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 소설의 무대가 된 지역의 분위기, 느낌, 공기, 이미지를 찾는다. 그것이 생생하고 시각적으로 묘사되어 있을수록, 나는 그 소설들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 물론 소설의 배경이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살아나자면 거기에서 먹고 살고 말하고 갈등하는 인물들의 성격이 잘 살아나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소설은 대단히 잘 쓴 작품으로 여겨진다. 


주인공 벨은 애커스 갭 출신으로, 홀아버지 밑에서 언니와 함께 누추하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 집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 트레일러에서 살다, 비극적인 사고 이후 아동보호 시설을 전전하며 성장기를 보낸 뒤 피나는 노력으로 로스쿨을 나와, 더 좋은 조건과 직장 제의도 뿌리치고, 심지어 남편과의 이혼까지 감수하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지방검사 노릇을  하는 특이한 인물이지만, 소설을 읽는 가운데, 그럴 만하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여러 정황과 이유를, 소설은 설득력 있게 그려준다. 어릴 때부터 그를 친딸처럼 보살펴주고 후원해 준 애커스 갭의 보안관 닉 포겔송도 더없이 매력적인 인물이다. 벨의 어두운 과거와 더불어, 벨과 10대 반항기의 딸 칼라와의 갈등, 아슬아슬한 줄타기도 소설의 현실성을 높여주는 좋은 장치다.


줄리아 켈러(오른쪽)는 여러모로 로라 립만과 겹친다. 물론 추리소설계에서 립만은 이미 일가를 이룬 인물이고 켈러는 이제 막 데뷔를 한 초짜이니 소설계에서는 비교가 안되지만, 언론계에서는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소설의 무대가 된 웨스트 버지니아 출신인 켈러는 시카고의 대표적 일간지인 '시카고 트리뷴'의 기자로, 일리노이 주를 뒤흔든 토네이도 때문에 큰 영향을 받게 된 한 작은 마을의 이야기를 3부로 나눠 보도한 공로로 퓰리처 상을 받았다. 게다가 오하이오 주립대 영문학 박사 학위까지 소지하고 있다. 그만큼 문학에 관심이 많고 조예도 깊다는 뜻이고, 기본적으로 글 솜씨 하나는 충분히 믿을 만하다는 얘기다. 오히려 이제서야 소설을 쓰는 게 놀라울 정도다. 


소설 곳곳에 그려진 웨스트 버지니아 주의 실상, 특히 가난에 찌들어 마약 범죄의 희생양이 된 작은 마을 주민들, 젊은이들의 비극적 현실, 만연한 가정 폭력의 다양한 변주는, 실제로 그런 현장을 목격하거나 경험하거나 심층 취재해 본 적이 없으면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런 묘사 속에서 작가의 안타까움, 동정심, 어떤 식으로든 그런 빈곤과 비극의 순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분노와 절박감이 느껴진다. 이 소설을 통해, 세계 최고의 나라로 꼽히는 미국의 음습한 구석, 점점 더 그 범위와 깊이를 넓히고 더해가는 마약 문제, 빈부 격차 문제, 끼니를 잇지 못해 아사하는 어린이까지 나오는 끔찍한 실상을, 켈러는 '고발'까지는 아니더라도, 진지하게 드러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상적으로 읽은 구절 몇 군데만 인용하는 것으로 독후감을 마친다. 9월에 벨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2탄 'Bitter River'가 나올 예정이다. 기대가 크다. 이 소설에 대한 내 별점은 ★★★★☆


애커스 갭이라는, 웨스트 버지니아 주의 한 가상의 마을이 가진 아름다움과 추함의 양면성을 묘사한 대목:

p. 27: It was a beautiful place, especially in the late spring and throughout the long summer, when the hawks wrote slow, wordless stories across the pale blue parchment of the sky, when the tree-lined valleys exploded in a green so vivid and yet so predictable that it was like a hallelujah shout at a tent revival. You always knew it was coming, but it could still knock you clean off your feet.


(애커스 갭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특히 늦봄과 긴 여름, 매가 흐릿하게 푸른 하늘에 느리고도 말없는 이야기를 쓸 때면, 나무들로 가득한 계곡들이 더없이 선명하면서도 너무나 예측가능한 초록으로 넘쳐날 때면, 그것은 마치 천막 기도회에서 나오는 할렐루야의 아우성 같았다. 그런 계절의 변화가 나타날 것을 늘 알고 있었지만, 막상 마주하게 되면 여전히 큰 충격을 받곤 하는.)


p. 28: It was also an ugly place, a place riddled with violence - the special kind of violence that follows poverty, the way a mean dog slinks along behind its master. A thoughtless, automatic, knee-jerk violence, a what-the-hell kind of violence that was, Bell had often heard Sheriff Fogelsong say, nearly impossible to stop.


(그곳은 추한 곳이기도 했다. 폭력에 찌든 곳 - 마치 주인 뒤에 숨어 살금살금 움직이는 야비한 개처럼, 가난을 따라다니는 특별한 종류의 폭력이 만연한 곳. 아무 생각 없이, 자동으로, 반사적으로 나오는 폭력, '알게 뭐야'식의, 벨도 종종 들어온 포겔송 보안관의 말처럼 '막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폭력이 난무하는 곳.)


본성은 사악하지 않지만 세상의 유혹에 너무 쉽게 넘어가고 함몰되고 휩쓸려 버리는,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인간 군상을, 디나라는 여성을 통해 표현한 대목:

p. 292: They were in Hick’s territory now. Bell knew. This was his kind of villain - not a criminal mastermind, but a petty, attention-starved show-off. Hick Leonard’s private law practice had depended for years on precisely this kind of person: more selfish and opportunistic than evil. The Deannas of this world didn’t go looking for trouble; they slid into it, like a cheap shack built on a muddy hillside that ends up in the creek. When the rain came - and the rain always came - down they went, scooting and sliding and making excuses and telling stupid lies as they rode the ooze to the bottom.


(그들은 이제 힉의 영역에 놓였다. 벨은 알았다. 이들은 힉이 취급하는 수준의 악인이었다. 악의 축이나 우두머리가 아니라 좀스럽고, 주위의 관심에 목마른 과시형 범죄자들. 힉 레너드의 민사 소송은 오랫동안 이런 유형의 인간에 의존해 왔다. 사악하다기보다는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인간들. 디나 같은 부류는 부러 문제를 찾아다니는 게 아니다. 문제 속으로 미끄러져들어가는 것이다. 진창의 언덕 위에 서 있다가 개천까지 떠내려가고 마는 싸구려 판잣집처럼. 비가 오면 - 비는 언제든 오게 돼 있다 - 판잣집은 아래로 떨어진다. 그렇게 휩쓸려 내려가면서, 아래 바닥의 진창 속을 따라 흐르면서 그렇게 된 온갖 변명과 멍청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