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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ge Against the Dying

'비밀을 지키는 것과 거짓말을 하는 것은 똑같은 기술을 요구한다. 둘다 습관이 되고 거의 중독에 가까워져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그러지 않기가 어렵게 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자기 나이를 말하는 여자를 절대 믿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 비밀조차 지킬 수 없다면 당신의 비밀도 지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쉰아홉 살이다.'


'죽어가는 자들에 대한 분노'쯤으로 번역될 'Rage Against the Dying' (베키 매스터먼 지음)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브리짓 퀸(Brigid Quinn)의 인상적인 방백 중 하나다. 퀸은 전직 FBI 요원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은퇴한 지 4년이 지났고, 우연히 한 강의에서 만난, 역시 은퇴를 앞둔 대학 교수 카를로 - 그래서 퀸은 그를 Professor의 유사 발음인 '퍼페서'라고 부른다 - 와 눈이 맞아 동거하면서 조용하고 행복한 은둔 생활을 즐긴다 (퀸과 카를로가 강의실에서 눈이 맞게 되는 사연도 퍽 재미있다).


하지만 위 인용에도 나오듯이 퀸은 FBI 경험에서 체득한 습관과 신중함, 혹은 두려움으로 남편에게조차 자신의 실제 이력, 속깊은 불안감과 죄책감, 부채감을 숨기고 있다. FBI에서 일하기는 했지만 저작권 침해를 단속하는 따분한 업무를 맡았었기 때문에 별로 할 말이 없다는 식이다. 어느 누가 "저작권 침해 문제라? 와 재미있었겠다. 더 얘기해주세요"라고 할까? 퀸으로서는 더없이 편리한 가림막인 셈이다. 


하지만 퀸의 실제 전공은 악질 성범죄자/살인범들을 잡는 일이었고, 그의 능력은 아직도 FBI 안에서 '전설'로 회자될 정도로 탁월했다. 자신이 직접 훈련시켜 성범죄자를 유인하는 작전에 투입한 부하 요원이 납치되어 실종되기 전까지는... 그 사건은 퀸이 FBI에 있는 동안 해결하지 못한 유일한 미제 사건이었고, 마음 속에 영원히 고통스러운 상흔으로 남은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잊고 싶었고 묻고 싶었던 과거는 어느날 갑자기 퀸을 다시 찾아온다. 불심검문에서 걸린 플로이드 린치라는 남자가, 퀸의 FBI 제자 제시카를 비롯한 여섯 명의 나이 어린 실종 여성들을 납치 살해한 범인임을 자백했다는 것이다. FBI의 악몽으로부터 영영 벗어나 은둔하고 싶었던 퀸의 바람은 지킬 수 없는 다짐이 되어 버린다. 카를로에게 자신의 진짜 정체를 알려줘야 할까? 게다가 나이든 여성만 노리는 또다른 도착적 성범죄자와 격투 끝에 그를 우발적으로 살인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퀸의 상황은 점점 더 복잡하게 꼬여간다. 


무엇보다 큰 의문은 과연 린치가 진짜 범인인가 하는 점이었다. 하지만 사형 대신 무기형으로 감형 받는다는 조건으로 그가 알려준 범행 수법과 제시카의 시신 위치는 정확했다. 그럼에도 어딘가 마음 한 구석 찜찜함을 떨쳐내기 어렵다. 더욱이 사건을 담당한 현직 FBI 요원인 로라 콜먼은 그의 자백이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며 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퀸도 잘 아는 콜맨의 상관은 승진에 눈이 멀어 연쇄 강간살인법이 잡혔다며 언론에 공개하면서 수사 종결로 몰아간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오랫동안 무거운 짐으로 남아 있던 퀸의 부채감은 정말로 해소된 것일까? 


어떤 경로로 이 소설을 알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뉴욕타임스의 범죄소설 소개란에서 보고 도서관에 대출 신청을 했을 것이다. 주인공이 슈퍼맨 스타일의 남성이 아니라 환갑을 앞둔 할머니 - 라고 말하기는 어폐가 있지만 - 라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미처 모르는 (살인) 기술과 뛰어난 추리력, 그리고 무엇보다 한 번 파고들면 끝을 봐야 하는 집중력과 끈기를 보여준다는 점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자그마한 체구에, 평온한 중년의 여성이, 잔혹하고 살벌한 도착적 성범죄와 연쇄 살인을 추적한다는 설정부터가 독자의 긴장감을 자극하기에 그만이다. 


또 하나 매력적인 것은 소설가 베키 매스터먼 (오른쪽, 사진 출처: 뉴욕타임스)의 차분하고 침착한 톤, 그리고 퀸의 입을 통해 들려주는, 세상사에 대한 약간은 달관한 듯하고, 약간은 비관적인 듯하고, 그러면서도 곳곳에서 낙관적인 유머로 균형을 잡아주는, 퍽 완숙한 문장력이다. 책 표지에 캐나다의 유명 추리소설가인 린우드 바클리의 평이 실려 있는데, 이 소설의 전체적 정서를 이보다 더 잘 요약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충격적이다. 매스터먼은 세상의 몹쓸 꼴을 너무 많이 봐버린 천사처럼 글을 쓴다.'


퀸의 세상에 대한 시선이 꼭 그렇다. FBI에서의 온갖 몹쓸 경험들이, 세상에 대한 낙관을 막고, 정직과 진실보다 거짓말과 은폐를 더 자주 택하게 만들며, 진실한 사랑이나 우정을 믿지 못하게 방해한다. 편안한 은퇴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언제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긴장감을 끝내 떨쳐내지 못한다. 하지만 퀸의 천성은 비관과 포기, 패배와는 거리가 멀다. 끝까지 밀어부치는 의지력이 그보다 더 강인할 수 없다.


'브리짓 퀸을 소개합니다'라고 쓰인 이 소설의 표지는 적어도 두 가지를 시사한다. 하나는 이 책이 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첫 작품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앞으로도 퀸을 중심으로 한 소설이 계속 나올 것이라는 예고. 다음에는 또 어떤 사건과 퀸이 씨름하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퀸을 롤 모델로 존경하는 현직 FBI 요원 로라 콜먼과의 '콜라보'도 기대되는 대목. 별점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