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기

Olympus has fallen

포스터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위는 공식 포스터가 아니라 다른 영화의 포스터와 적당히 합성한 것이다. 특히 백악관 위에 뜬 UFO가 보이시는가? SF 'Independence Day'의 포스터 부분이 들어갔다. 백악관이 파괴되는 영화가, 미국에서는 의외로 잘 먹힌다. 한국에서도 청와대 폭파 장면을 넣은 영화 한 편 만드는 건 어떨지?


신작 영화 '올림퍼스 함락'(Olympus has fallen)을 아내와 함께 봤다. 올림퍼스는 백악관의 코드명이다. 그러니까 '백악관 함락'이라는 뜻이다. 남북한 간의 긴장 관계가 고조되는 가운데 한국의 국무총리가 미국 대통령 (애런 에카트)을 만나러 백악관에 오는데, 마침 정체 불명의 군수 항공기가 백악관을 향해 돌진하는 비상 사태가 벌어진다. 대통령은 참모들과 함께 백악관 지하의 벙커로 피신하면서 한국 국무총리 일행도 함께 데리고 가는데, 알고보니 국무총리의 경호대가 사실은 친북 테러리스트 그룹이었다! 이들은 벙커 안에서 대통령의 경호원 전원을 순식간에 살해하고 한국의 국무총리도 외부의 비상대책위원회가 영상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 처형한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도륙당하는 가운데 한 경호원이 죽으며 무전으로 외친다. "Olympus has fallen, Olympus has fallen...!"  


대통령이 인질로 잡힌 데다, 미국 전역에 배치된 핵탄두 장착 대륙간탄도탄(ICBM)을 일거에 자폭시켜 미국 전체를 핵 방사능의 지옥으로 변할 위기에서, 임시 대통령이 된 국회의장(모건 프리먼)과 비상대책위원들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다. 잔인하기 그지 없는 강(릭 윤)이 이끄는 테러리스트 그룹의 목적은 남한에 주둔한 미군과 근처 공해상의 제7함대를 다 철수시키는 것. 그러면 북한이 남침해 72시간 안에 한반도를 적화통일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백악관 안에 마지막 희망이 있었다. 전직 대통령 경호원이었던 마이크 배닝(제라드 버틀러)이 숨어 있었던 것. 백악관판 다이하드가 이제 막 시작된다.


'올림퍼스 함락'은 액션 영화로서는 별반 손색이 없는, 꽤 잘 만든 작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적당한 긴장감을 잘 유지해 준다. 액션 장면들도 매우 사실적이다. 버틀러는 최고 경호원으로서 손색없는 몸매와 박진감 넘치는 액션을 선사한다. 그뿐 아니라 다른 주조연 배우들의 연기도 모두 안정된 편이다. 앞에 잠깐 대통령 부인으로 등장하는 애쉴리 저드부터 버틀러의 전직 상관인 안젤라 바셋, 애런 에카트, 모건 프리먼 등, 적어도 미국 쪽 배우들은 그럴듯하다. 


미국 액션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불편함 중 하나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죽는다는 것. 그리고 딱 세 부류의 인간밖에 안나온다는 것: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패닉 상태에서 우왕좌왕하다는 죽는 사람들. 그리고 주인공한테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는 악당들. 그리고 주인공 그룹. 


아내와 나를 오금저리게 만들고 민망해 하고, 때때때로 짜증나게 한 것은 테러리스트들로 나온 미국계 한국인 배우들의 엉터리 한국어 발음이었다. 특히 벙커에서 컴퓨터를 조작하는 역할을 한 여자대원('맬라나 리'라고 돼 있다)은 인상도 더러운 데다 목석 같은 연기에, 어쩌면 그렇게 한국말을 못하는지, 차라리 영어로 하지, 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모욕적으로 들렸다. 한국 사람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국적 불명의 한국말들이 수치심마저 느끼게 했다. 게다가 버틀러에게 죽어가는 테러리스트들의 한국 대사라는 건 왜 개새끼, 엎드려, 저리가 따위의 1차원적 표현밖에 없는지 그들이 등장해서 그런 단편적 말을 침 뱉듯 뱉어낼 때마다 의자 밑으로 숨고 싶을 만큼 민망했다. 북한의 악한을 전문으로 연기하는 릭 윤도, 어쩌면 저렇게 연기에 진전이 없을까 싶을 만큼, 그저 한 가지 표정으로 잔혹한 연기만 - 그것도 연기라면 - 했다. 꼭 그런 배역이 아니더라도, 릭 윤이라는 인물 자체에서 별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이 영화에서 그가 보여준 최고의 연기는 아마 마지막 장면에서 제라드 버틀러를 향한 돌려차기가 아니었을까?


제작비가 7천만달러(약 780억원)나 되는 영화에서, 남북한의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주고 교정해줄 만한 사람 하나 고용할 돈이 없었을까?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남북한 상황에 대한,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의 그 부박하고 왜곡된 시각에 모욕감을 느꼈을 법한 대목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2만8천여 주한미군이 DMZ에 주둔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 미군이 철수하면 북한이 곧바로 쳐밀고 내려와 사흘 만에 남한을 접수할 거라고? 지금이 1950년대 상황이냐? 


하지만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백악관을 방문한 한국의 장관이 외무장관이 아닌 국무총리라는 점에서 일단 '어, 저게 아닐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그 장관을 수행한 경호원들이 테러리스트로 돌변한다는 대목에서 완전히 깨버렸다. 그렇다면 장관 혼자 미국으로 날아가서, 미국의 사설 경호업체를 고용했다는 뜻이냐? (영화 속에서 대통령은 한국의 장관을 'prime minister'라고 부른다. 상대국 장관을 예의상 다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니라면 국무총리가 맞을텐데, 이 영화의 공식 사이트에 나온 내용을 보면 '외무장관' (foreign minister)이라고 돼 있다.)


그뿐이 아니다. 백악관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한 뉴스 앵커가 '세계에서 가장 철통 같은 경호를 자랑하는 백악관이...'라고 말한다. 리얼리? 정말 미국놈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우물안 개구리식 사고에 찌들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치밀었다.


아무려나, 미국인들의 입장으로 본다면 퍽이나 잘 만든 애국심 고취 영화였겠다. 사실은 한국인인 나조차 릭 윤쪽보다 미국쪽, 특히 버틀러를 응원했으니까. 버틀러가 좀 멋있어야지. 게다가 릭 윤을 비롯한 저쪽 악당 그룹은 일말의 동정심을 얻을 만한 인간적 요소를 털끝만큼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영화의 1차원성이랄까, 얄팍함을 드러낸 대목이라고 봐야겠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눈요기로 보기에는 잘 만든 영화. 하지만 뭔가 느끼고 감동할 거리를 찾을 생각이라면 아서라, 말아라, 할 영화. 


감독은 덴젤 워싱턴에게 아카데미 주연상을 안겨준 '트레이닝 데이'의 앙투완 푸쿠아인데, 한국이라는 나라를 그저 소재로 삼았을 뿐, 그 나라에 대한 일말의 예의나 관심을 보일 정도의 성실성은 전혀 없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영화 전체에 별처럼 널려 있다. 제작사도 마찬가지. 이를테면 영화 속에서 강여석인지 강연석(Kang, Yeon-sak)인지, 릭 윤의 역할 이름이 분명히 나오는데, 막상 캐스트 명단에 보면 성명 대신 성만 'Kang'이라고 달랑 나와 있다. 미국인 이름이 아닌 다른 나라 이름은 'Who cares?'라는 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이랄밖에...) 


내 영화 별점은 액션영화로서는 ★★☆, 영화 속의 배경 지식과 사실성을 고려하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