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기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 (A Good Day to Die Hard)

외국 영화의 제목을 번역하지 않고 고스란히 한글로 써버리는 요즘의 풍토를 결코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이 영화만은 제대로 뽑았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맨끝 'hard'를 뺌으로써 전혀 엉뚱한 뜻이 돼버렸지만). 물론 영화를 다 보고 난 다음에 내린 결론이었다. 정말 브루스 윌리스와 그 아들을 비롯해 다이하드라는 영화 프랜차이즈 자체가 다 이번 편으로 죽고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으니까...


2주에 한 번씩, 아내와 토요일 오후의 다섯 시간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두 아이를 놀이센터에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오티즘 아이들을 위한 센터여서 큰 애도 안심하고 맡길 수 있고, 작은 애는 또 작은 애대로 제 또래 아이들과 신나게 놀 수 있으니 아이들로서나 그 부모들로서나 '윈-윈'인 셈이다. 


이번 주에는 볼 만한 영화가 눈에 띄지 않았다. 이번에 아카데미상 여우 조연상을 안겨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볼까 했지만 아무래도 큰 화면에 빵빵한 음질로 볼 거라면 뭔가 '스펙터클'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접었다.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아르고는 영어에 대한 부담 때문에 - 대사가 많을 것 같아서 - 역시 건너뛰었다. 개봉한 지 꽤 지난 장고 같은 작품도 있었지만 상영 시간이 어정쩡했다. 몇주 전에 어렵사리 본 '라이프 오브 파이'도 우리 형편에 맞는 상영 시간을 찾다 보니 웨스트에드먼튼몰까지 갔던 것이고,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꽤 오랜 시간을 허비하며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그래도 영화를 '영화관에서' 굳이 볼 거면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눈요깃거리'를 고르자, 라는 게 아내와 나의 지론이었다. 무슨 행사처럼 모처럼 찾아간 영화관에서까지, 진지한 영화를 보며 골치를 썩이고 싶지 않았다. 무지막지하게 큰 화면을 꽉꽉 채우며 나오는 사람 얼굴 보는 것도 고역이었다. 옛날 한국에서 살던 시절, 주말이면 치고 터지고 때려부수는 1~3류 액션 비디오들만 찾았던 기억도 새삼 떠올랐다. 


그리곤, 아니 그러나, 결론은 물론 후회 막급이었다. 영화를 보는 와중에도, '내가 대체 여기 앉아서 무슨 짓을 하고 있지, 내가? 저 따위 쓰레기 영화를, 25달러나 내고 보다니...' 하는 생각이 수도 없이 떠올랐다. 중간중간에 하품도 나왔다. 이야기의 졸가리도 없고, 배우들은 하나같이 과장된 연기 아니면 발연기였으며, 대사들은 또 왜 그렇게 유치한지, 정말 '총질에 미친 돌대가리 아메리칸'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존 무어라는 무능한 감독은 도대체 어떻게 저 값비싼 블록버스터의 감독으로 발탁됐는지 지극히 의심스러울 정도로 카메라워크가 수준 이하였다. 대화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줌인하는 장면은 왜 그렇게 많으며, 얌전히 대화하는 그 사람들의 얼굴을 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끊임없이 흔들어대야 하는 거냐? 짜증을 넘어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아무리 람보식, 아니 브루스 윌리스식 액션을 기대했다고 해도, 전투에는 일말의 계획이나 작전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마지막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윌리스와 그 아들 역을 맡은 제이 코트니 - 정말 질 낮은 목석 연기를 선보였다 -가 체르노빌의 적 소굴을 습격하기 직전 대화를 나눈다. 


애비 존 매클레인: "무슨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냐?"

아들 존 매클레인 (주니어): "아니 없어요. 그냥 들어가서 되는 대로 해 보는 거죠. (Just wing it)"


거기에서 "이건 영화고 우린 주인공이야. 무슨 짓을 해도 안죽어"라는 말이 천둥처럼 머릿속에 들리는 듯했다. 영화도 소설처럼 허구지만 그 허구 안에 나름대로 리얼리티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고, 그게 제대로 세워져야 독자/관객도 더 깊이 몰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달랑 두 놈이 수십 명을 상대하러 들어가면서, 작전도 계획도 없어요, 일단 가서 부딪혀 보는 거죠, 라고? 저게 실제 상황이었다면 아예 습격할 엄두조차 못냈을 확률이 99%이고, 달걀로 바위치기말고는 달리 대안이 전혀 없는 1%의 상황이었다면 며칠을 머리 싸매고 고심하고, 공격할 장소의 주변을 정탐하고, 몇 명이나, 또 어느 위치들에 경비를 설지, 요모조모 따져보고 예상하고 계산했을 것이다. 


몇주 전에 본, 그저 그렇다, 라는 감상 정도를 안겨주는 데 그쳤던 톰 크루즈판 '잭 리처' 영화가 돌연 세기의 걸작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수많은 이유 중에서도), 그래도 그 영화는 적을 공격하기 전에 변변찮으나마 작전 짜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스프레이 몇 번 좍좍 뿌리는 것으로 체르노빌의 그 악성 방사능이 말끔히 제거된다. 영화 속의 여자 악당은 그렇게 스프레이를 뿌리자마자, 마치 방사능이 무슨 향수라도 되는 양 보호 마스크를 벗고 킁킁댄다. 이보다 더 기가 찬 장면이 달리 있을까? (뉴요커의 리뷰 참조. 아주 명쾌하다.)


둘 다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건 영화가 대실망이어서가 아니라 햇빛 때문이다. 아직 영화를 보기 전이다.


'생각에 관한 생각'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도 소개된 대니얼 카너먼의 'Thinking Fast and Slow'는 인간의 마음/심리/생각이 가진 여러 한계와 문제점을 보여주는데, 이번에 아내와 내가 겪은 '다이하드 대재난'과 관련해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은 '경험하는 자아'(Experiencing self)와 '기억하는 자아'(Remembering self) 사이의 머나먼 간극이다. 태작이나 심지어 쓰레기 같은 영화를 잘못 고른 탓에 영화관에서 정신적 고문을 당하는 - 경험하는 - 그 순간의 자아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가물가물해지고, 당시의 고통을 희석해서, 과소평가하게 마련인 '기억하는 자아'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남들이 보지 말라는 영화는 보지 말아야지'라던 다짐조차 종종 밀쳐내고, '혹시 이번에는?'이나 '에이, 그래도 설마 그 정도로 끔찍하려고?' 하는 어정쩡한 기대와 우연을 이유로 들이대며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간극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지적 덫 (Cognitive trap)이고, 기억하는 자아의 폭정인 셈이다.


다시 두 주 뒤에도 또 영화관을 찾게 될 공산이 큰 아내와 나. 그 때는 무슨 영화를 보게 될까? 별 다섯 받은 '예술 영화,' 아니면 그저 그렇다, 라는 평을 받은 블록버스터? '절대로 보지 마라'라는 평을 받은 영화만 아니라면, 다시 후자가 될 공산이, 걱정스러울 지경으로 높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 '굿 데이 투 다이'에 대한 평도 바로 그 수준 - '쓰레기 같은 영화이니 허튼 데 돈 낭비하지 마시라' - 에 가까웠는데도 결국 보러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니 스스로도 미심쩍고, 걱정스럽고 불안할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