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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Sherlock' - 달콤쌉싸름한 21세기의 셜록 홈즈

홈즈(베네딕트 컴버배치)와 왓슨(마틴 프리만). 누가 누구인지 눈치 채시겠는가? :)


"어제 그거 봤어?"

"봤지. 정말 너어무 재밌더라. 기가 막혀!"

"정말이야. 다음 주까지 또 어떻게 기다리냐..."


내가 낀 자리에서 직장 동료들끼리 한 얘기다. 나는 그게 무슨 프로그램이냐고 물었고 그들은 '셜록'(Sherlock)이라고 알려주었다. "셜록 홈즈를 요즘 시대에 맞춰 각색한 것인데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나는 집에 텔레비전이 없었고, 설령 있었다고 해도 프로그램 중간중간의 광고 때문에 매 에피소드를 따라갔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중에 DVD로 나오거나 아이튠즈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게 되면 한 번 봐야겠다, 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곧 까맣게 잊었다.


지난 연말 이 지역의 유서깊은 일간지인 에드먼튼 저널에서 2주 동안 공짜 이벤트를 펼쳤다. 아이튠즈를 통해 앱이나 음악, 드라마의 일부를 거저 내려받을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별 '영양가'는 없었다. 그 중 하나로 나온 것이 TV 시리즈 '셜록'의 시즌 1, 그 중에서도 첫 에피소드였다. 그제서야 옛날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어디, 얼마나 재미있길래?



그리곤 요렇게 됐다. 시쳇말로 셜록에 '뿅 갔다.' 아니, 셜록을 연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 그리고 왓슨으로 나온 마틴 프리만에게 흠뻑 매료되고 말았다. 나는 컴버배치를 셜록에서 처음 만났지만 마틴 프리만과는 구면이다. 피터 잭슨의 호빗 삼부작에서 주인공 빌보 배긴스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구글로 이리저리 찾아보면 금방 나오지만 둘다 둘째 가라면 서러운 명배우들로 이미 자리를 굳힌 사람들이다. 특히 컴버배치는 뛰어난 목소리 덕택에 오디오북도 다수 녹음했을 정도.


셜록이 매력적인 이유를 꼽자면 여러가지지만 무엇보다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아서 코난 도일의 원작에 나오는 기본적인 얼개와 캐릭터, 분위기 등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주드 로가 나오는 셜록 홈즈를 실로 증오하고 경멸하는데 - 그래서 굳이 볼 생각도 없다 - 그 가장 큰 이유는 이름만 빌려왔을 뿐 코난 도일이 공들여 묘사하고 개발한 셜록 홈즈와 왓슨의 성격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최소한의 존경심이라도 가졌어야 하지 않을까, 싸구려 할리우드?). 성격까지 갈 것도 없이, 거의 자폐증에 가까울 정도로 과묵한 장신의 홈즈와 깃털처럼 경박한 다우니 주니어가 도대체 어떻게 맞을 수 있단 말인가? 


각설하고, 드라마 속의 컴버배치는 코난 도일이 소개한 그 요령부득의 셜록 홈즈를, 현대적으로 (이게 중요하다), 잘 재현하고 있다. 비사교적이다 못해 반사교적일 정도로 다른 사람들의 기분이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 아니, 못하고 (그게 그의 태생적 성격이니까) - 한 번 호기심을 발동하면 정신병적으로 집착하고, 여느 사람들은 전혀 눈치채지도 감지하지도 못하는 온갖 주변 정황과 단서들을, 마치 슈퍼컴퓨터가 천문학적 데이터를 분석하듯, 순식간에 꿰어맞춰 사건의 졸가리를 잡아내고 범인을 찾아내는 천재성을, 컴버배치는 눈부신 연기로 펼쳐 보인다. 


특히 셜록 홈즈, 하면 떠오르는, 상대방을 한 번 죽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직업은 물론 가족 관계, 문제점, 고민거리, 심리 상태까지 좍 꿰어버리는 예리하기 짝이 없는 관찰력과 유추력을, 시청자들조차 빙긋이 웃음짓게 만들 만큼 잘 연기한다. 셜록은 왓슨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종군하고 갓 돌아온 군의관이군요"라고 대뜸 말한다. 왓슨이 깜짝 놀라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셜록은 이렇게 대답한다.


"Here is a gentleman of a medical type, but with the air of a military man. Clearly an army doctor, then. He has just come from the tropics, for his face is dark, and that is not the natural tint of his skin, for his wrists are fair. He has undergone hardship and sickness, as his haggard face says clearly. His left arm has been injured. He holds it in a stiff and unnatural manner. Where in the tropics could an English army doctor have seen much hardship and got his arm wounded? Clearly Afghanistan."


"여기 의사 타입이면서 군인 느낌도 풍기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다면 분명 군의관이겠죠. 그는 최근 적도 지역에서 돌아왔어요. 얼굴이 탄 걸 보면 알 수 있는데 그게 정상은 아니거든 손목은 하야니까 말이죠. 또 그가 곤경을 겪었고 병을 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핼쑥한 얼굴이 그걸 잘 보여주니까. 왼팔을 부상당한 적이 있군요. 뻣뻣하고 어색한 자세로 왼팔을 감싸고 있는 걸로 알 수 있죠. 영국의 군의관이 곤경을 겪고 팔을 부상당할 수 있는 적도 지역이 어디겠어요? 분명히 아프가니스탄이죠." 


시즌 2, '바스커빌의 개' 에피소드에서는 자신이 심리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사실을 왓슨에게 증명해 보이려고 그들이 앉아 있는 카페의 다른 손님들의 신상명세와 숨기고 싶은 구석들을 한 번에 죽 읊어대는데, 그 대사가 얼마나 빠른지 실로 M60 기관총을 연발로 쏴대는 듯 쉴 틈이 없었다. 저 긴 대사를 저렇듯 광속의 스피드로, 단 한 번의 헛 발음도 없이 일사천리로 내뱉는 게, 과연 가능할까 싶을 정도였다. 아래 자막도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런데 셜록이 낮은 톤으로, 아무런 감정도 비치지 않은 채 중립적으로 다다다다다다다다 자신의 관찰 내용을 풀어낼 때, 시청자는 작은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그의 초인적 관찰력과 추리력 앞에서, 마치 마이클 조던의 더블 클러치나 로저 페더러의 환상적 발리를 볼 때와 비슷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연기에서는 마틴 프리만도 만만치 않다. 컴버배치와 같은 카리스마와 충격 효과는 없지만, 2인자 혹은 조수로서 느끼는 열등감, 경이감, 존경심, 짜증, 실망감, 애증의 감정 등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눈빛, 눈썹의 움직임, 대사의 페이싱(pacing) 등을 통해 미묘한 뉘앙스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감정 표현에 관한 한 프리만은 실로 발군이다. 그처럼 절제된 그의 연기는, 자칫 툭툭 어색하게 튈 수 있는 컴버배치의 셜록을 견고하게 지탱해 주고 드라마의 균형을 잡아준다. 대단하다.



셜록은 지금 현재의 런던을 무대로 하고 있다.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온갖 첨단 기기들이 다 나온다. 왓슨은 '수사 컨설턴트'(Consulting detective)인 셜록을 주인공으로 한 블로그를 연재하고 있고, 많은 의뢰인들은 그 블로그를 보고 셜록과 왓슨이 동거하는 베이커 스트리트 221B로 찾아온다. 무대와 분위기, 정서는 다 현재지만 주요 인물들과 배경, 에피소드는 대체로 코난 도일의 원작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추리력은 도리어 셜록 홈즈보다 더 뛰어나지만 게을러서 늘 앉아 있기만 한다는 형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영국 왕실과 관련된 고위 관료로 나오고, 셜록의 숙적 모리아티, 셜록의 하나뿐인 수수께끼의 여인도 한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드라마를 전개하는 방식도 매우 흥미롭다. 요즘의 젊은 세대들이 좋아할 법한 재치 만점의 기법들이 자주 등장한다. 셜록이 의뢰인이나 다른 사람을 관찰할 때 그가 바라보는 대상 - 단추, 소매의 헤진 솔기, 구두 등 - 옆에 자막을 넣는다거나, 셜록이 혼자 고민할 때 그의 머릿속을 그래픽으로 보여주는 식이다. 그런 컴퓨터 그래픽의 개입이 너무 잦으면 짜증스러울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지극히 적절하고 재치 있다고 여겨진다. 


에피소드 하나하나의 완성도도 더없이 빼어나다. 요즘 TV 드라마의 수준이 워낙 높아져서, 원작이 긴 경우 영화보다 드라마 쪽이 도리어 더 높은 품질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셜록이야말로 그런 사례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또 다른 예로 나는 HBO의 'Game of Thrones'를 들고 싶다). 'BBC가 제작한 드라마는 내용도 안보고 가져간다'라는 속설을 입증한 사례이기도 하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숙적 모리아티가 주인공으로 표나게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에서 눈에 띄게 현실감이 떨어지고, 따라서 드라마로서의 재미도 다소 줄어든다는 점이다. 모리아티가 워낙 탁월한 '슈퍼 악당'으로 등장하다 보니 줄거리도 그렇게 잡을 수밖에 없겠지만 시청자 입장에서는 좀 씁쓸한 게 사실이다. 차라리 모리아티의 비중을 줄이고, 에피소드 하나하나의 독립성이 보장되는 사건들로 채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시즌 2의 마지막에 모리아티와 셜록 홈즈 둘 다 최후를 맞는 것으로 나오는데, 올해로 예정된 시즌 3에서 이들의 생환을 어떤 식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이걸 스포일러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코난 도일의 원작에서도 죽었던 셜록 홈즈가 다시 돌아오기 때문). 


별점은 당연히 ★★★★★ 초강추!


아래 유튜브 비디오들은 맨 위부터 셜록 DVD에 나오는 드라마 뒷 이야기 1, 2편, 그리고 PBS에 나온 셜록 제작 관련 이야기로 컴버배치와 제작자들이 출연했다 (이 프로그램의 1편은 다운튼 애비였다). 맨 아래 PBS의 '매스터피스' 프로그램은 제대로 알아먹기 어려웠다. 영국식, 게다가 흘리는 발음이 정말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셜록이 얼마나 많은 열혈 팬을 거느렸는지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았다. 7백명쯤 들어갈 수 있는 방청석을 차지하려고 1만명 이상이 신청했다고 하고, 어떤 방청객은 저 멀리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샬럿에서부터 뉴욕까지 차를 몰고 왔다고 했다. 방청객들은 진행자보다 더 훤히 셜록과 컴버배치에 대해 꿰고 있었고, 가히 아이돌 콘서트 장을 방불케 했다. (너드(nerd), 혹은 기크(geek)들의 콘서트라고 해도 될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