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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세스 브라이드 - 우화, 혹은 우화 비틀기

가끔 옛날 영화나 책이 생각날 때가 있다. 'Princess Bride'가 그런 경우다. 개봉되었을 때는 그저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인구에 널리 회자되고, 그래서 나중에 거의 컬트적 인기를 끌게 된 영화 중 하나이다. 그 비슷한 사례로 문득 떠오로는 영화는 '쇼섕크 탈출'이다. 


책 표지 대신 비디오 표지를 썼다. 더 그럴듯해 보여서...

하지만 이번에는 영화가 아닌 책으로 <Princess Bride>를 읽었다. 영화가 책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았다. 아마존의 'Daily Deal'을 통해 싸게 나왔길래 받아본 것이다. 


지은이는 윌리엄 골드만이라는 사람인데, 알고 보니 할리우드에서 '전설'로 통하는 시나리오 작가였다. 서부 영화의 고전 중 하나로 평가 받는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1969년), 더스틴 호프만의 '마라톤 맨'(1976년), 전쟁 영화의 고전 '멀고 먼 다리' (1977년),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치는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의 활약을 담은 '대통령의 사람들' (1976년), 캐시 베이츠의 진절머리 나는 명연이 기억에 남는 '미저리'(1990년) 등이 다 그의 작품이다. 물론 '프린세스 브라이드'도 그가 시나리오를 썼다. 


<프린세스 브라이드>는 왕과 왕자, 왕비, 공주, 도적, 칼잡이, 해적 등 어린이들이 좋아할 모든 요소를 다 갖춘 환타지다. 하지만 책 앞 부분은 지은이의 개인사다. 그가 처음 S. 모겐스턴의 원작을 '듣고' - 아버지가 밤마다 이 활극을 읽어주었다 - 얼마나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그래서 자기 아들도 그런 감동을 받을 거라고 기대하고 책을 찾아 헤매는 얘기가 나온다. 수십년 전에 나온 책이니 쉽게 구할 리 만무하다. 그래도 어렵사리 구해 아들에게 주었는데 몇 페이지도 못나가고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깊이 실망한 지은이는 우연히 책을 들춰본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책의 내용이 자기가 알고 있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저녁마다 읽어주었던 내용은 그 중에서 아들이 좋아할 법한 부분만 추린 것이었다. 실제 원본은 누구든 지루해마지 않을 온갖 의전에 대한 내용, 이삿짐을 싸거나 푸는 내용, 신하들을 이끌고 행차하는 왕과 그 신하들에 얽힌 시시콜콜한 내용 등이 마치 지뢰밭처럼 숨어서, 손쉬운 독서를 가로막고 있었다. 하여 윌리엄 골드만 판 <프린세스 브라이드>가 전개된다. 모건스턴의 원작을 어린이용으로 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내용 중간중간에, S. 모겐스턴의 원작에서는 이 부분이 쓸데없이 길고 장황하게 묘사되었는데 불필요하다고 생각돼서 빼거나 줄였다는 설명도 나온다. 


그런데...이게 다 뻥이다! 아니, 그런 설명, 혹은 주석도 사실은 다 소설의 일부다. S. 모겐스턴이라는 인물은 존재하지도 않고, 따라서 그의 개작 때문에 모겐스턴 가문과 법정 소송이 붙었다는 얘기나 뚱보 아들의 생일 선물로 책을 어렵사리 구했다는 얘기는 다 허구다. 말하자면 <프린세스 브라이드>는 지은이가 생활하는 현대, 특히 할리우드의 풍경과, 지극히 표준적이고 예측 가능한 동화나 환타지의 전형을 유머러스하게 버무린 일종의 잡탕이다. 책 제목도 골드만의 두 딸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하나는 '공주'를 더없이 좋아하고, 다른 하나는 '신부'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어서, 그 둘을 버무려 '공주 신부'로 제목을 뽑았다는 것이다. 


<프린세스 브라이드>는 그래서, 약간 덜 세련된 슈렉을 보는 것 같다. 덜 세련되었다는 것은 동화와 현대의 우화가 때때로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때로는 동화의 이야기 흐름이, 골드만의 약간 거만하고 과장된 설명조의 글 때문에 툭툭 끊긴다. 짜증스러울 때도 있다. 동화의 줄거리도 실상 그렇게 매력적이지는 않다. 너무 어른스럽다는 점에서 그렇다. 공주/신부 버터컵 - 이런 이름도 다 의도적인 것이다 -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건 웨스틀리를 위기 상황에서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어'라며 매몰차게 내치는 장면은, 실로 어른스럽다. 바꿔 말하면 서글프도록 현실적이다. 이 여자, 정말 매력없지만 현실적이긴 하구나...


그런데 뒤에 이 여자가 연일 계속되는 악몽 끝에 개과천선한다. 사랑없이는 못살아...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뿐인가, 잔인하기 짝이 없는 고문 - 이 대목에 대한 묘사도 꽤 길고 섬뜩하다. 어린이용 책은 안되겠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또 다른 대목이다 - 끝에 죽었던 주인공이 몇 시간 뒤에 다시 살아나는 장면도, 아무리 소설이고 환타지라지만 에이~!


결론은 책보다 영화가 차라리 더 낫다. 군더더기 다 빼고, 인자한 표정의 형사 콜롬보 (피터 포크)가 손자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설정이, 골드만의 대체로 쿨하지만 종종 장광설로 빠지고 마는 원작보다 더 나아 보인다는 말이다. 별점은 다섯 개중 세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