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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Father's Day: 아빠 노릇 제대로 하라는 각성의 날?

나흘째 - 주말까지 치면 엿새째 - 회사에 안나가고 있다. 지난 주 수목금 사흘은 프라이버시 관련 컨퍼런스에 나가느라, 그리고 월요일인 오늘은 아내 대신 집에서 애들 건사하느라... 아내는 동준이 같은 '오티즘' 아이들을 둔 부모를 대상으로 한 글렌로즈 병원의 종일 세미나에 갔고, 나는 일종의 병가 비슷한 휴가를 내고 집을 보게 된 것이다. 


아침 7시20분쯤 동준이는 가장 일찍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로 행차하셨고, 그 다음엔 아내가 에드먼튼으로 출근하는 이웃의 차에 얹혀 세미나를 들으러 갔다. 나는 성준이를 데리고 'Ready Set Grow'라는 이름의 유치원(preschool)으로 향했다. 오늘과 모레, 이틀만 더 나가면 성준이의 유치원 생활도 끝이다. 9월부터는 유아원(kindergarten)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성준이 성화에, 너무 일찍 프리스쿨에 와 버렸다. 그래서 근처 산책로에서 시간을 떼우는 중.







일요일인 어제 (6월17일)가 아버지의 날(Father's Day)이었던 까닭인지, 아니면 종강이 얼마 안남았기 때문인지 오늘은 아빠들에게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10시30분까지 나와서 아이들과 놀아달라는 것. 당초 9시에 유치원에 데려다준 뒤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분위기가 다소 어정쩡했다. 게다가 오늘 프로그램은 모두 밖에서 노는 내용으로 꾸며졌노라는 얘기가 들렸다. 


결국 오전 내내 아이들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성준이도 아빠가 곁에 있는 게 좋았는지 퍽 신나게 돌아치며 잘 놀았다. 열 명 남짓한 성준이 또래들은 제각기 다른 개성을 분명히 드러내면서 정말 열심히들 놀았다. 혼자 구석에 앉아 모래를 만지며 노는 아이, 쉴새없이 뛰고 뒹구는 아이, 서너 명 짝을 지어 쫓고 쫓기는 놀이에 몰두하는 아이, 아이들의 웃음소리, 울음소리, 비명소리... 사방이 넘치는 에너지로 충만한 듯했다. 

마음 먹은 대로 잘 안되는 훌라후프도 몇 번 시도해 보고...

이번에는... 역시 훌라후프는 어려워! 아이들더러 마음대로 놀라고 여러 장난감을 풀밭 위에 흩어 놓았다.

미끄럼틀 옆의 땅을 팠다가는 메우고 팠다가는 메우고... 공을 묻었다 꺼내면서 보물이라며 흥분하고, 다시 묻었다 꺼내면서 또 treasure! 라며 신나 하고... 옆은 성준이의 단짝인 루카.


성준이는 그 중에서 퍽 소극적인 축에 들었다. 뜀박질에도 별 열의를 보이지 않았고, 미끄럼틀이나 그네에도 관심이 없었다. 루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조용한 아이와 붙어 모래밭을 파헤쳤다 묻었다 다시 파헤치거나, 터널을 해적선이라며 그 안에서 뒹구는 일을 되풀이했다. 모래밭을 파헤칠 때마다 보물을 캐낸다며 자못 흥분된 목소리로 떠들었고, '해적선'으로 상정된 터널 안에서는 이리저리 뒹굴거리며 모험 활극을 상상하는 듯했다.

놀이터를 벗어나 언덕을 오르내리며 논다. 아래 루카는 민들레 홀씨를 후후 불어 대고, 성준이는 언덕 위로 아래로 왕복 달리기를 하고...

다시 언덕 위로 뛰어 올라가기. 오른손에 든 것은 자칭 '망원경'.


11시쯤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빠 이제 가봐야 한다, 이따가 저녁때 보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들은 엉엉 울며 아빠의 우람한 허벅지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영영 헤어져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못 볼 사이인 것처럼 그 이별 의식이 퍽이나 간곡하고 구슬펐다. 아들이 아빠를 얼마나 좋아하고 우러러보는지 절절히 드러나는 장면. 성준인 아빠 간다고 하면, 오케이, 씨야 아빠! 하고 말텐데... 


그런가 하면 '테리'라는 이름의 다른 아빠는 딸 아이 크는 모습을 제대로 지켜보지 못하는 게 아쉬워 급여가 절반 이하로 깎이는 것도 감수하며 석유 시추와 관련된 직업을 포기하고 다른 사무직으로 바꿨노라고 말했다. "돈은 평생에 걸쳐 벌고 또 벌 수 있는 거지만 아이 크는 모습을 보는 건 한 번뿐이지 않느냐?"라는 반문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직장을 옮겨 딸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그가 본 강연자 - 스탠포드대 교수라고 했다. 한 번 찾아봐야 할듯 -는 청중 앞에서 컵 안에 골프 공을 채운 뒤 "꽉 찼느냐?"라고 물었다. 물론 청중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교수는 골프 공이 든 컵에 자잘한 콩을 넣었다. 골프 공들 사이로 콩이 들어찼다. 아 저럴 수도 있구나, 라는 듯 몇몇 청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는 다시 "컵이 다 찼느냐?"라고 물었다. 청중은 이번에도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교수는 다시 그 컵에 모래를 채웠다. 골프 공과 콩 사이로 모래가 스며들며 컵을 채웠다. "컵이 다 찼다고 보느냐?" 청중은 이번에도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교수가 말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다. 무엇을 먼저 채우느냐에 따라 삶의 품질과 가치가 달라진다. 골프 공은 여러분의 인생에서 중요한 요소들을 상징한다. 여러분의 가족, 자녀, 건강, 친구. 다른 모든 것을 잃은 뒤에도 남는 것들. 이것들만으로도 여러분의 삶은 여전히 부족함 없이 풍요로울 것이다. 콩은 여러분의 직업, 집, 자동차 같은 것, 그리고 모래는 다른 모든 것, 일상의 자잘한 일들이다. 만약 컵에 모래부터 채운다면 콩이나 골프 공을 넣을 공간이 없어질 것이다. 여러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그런 사소한 일들에 탕진한다면, 정작 여러분의 인생에 중요한 일을 할 시간이 없어질 것이다. 모래부터 채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여러분의 행복에 요긴한 것들에 관심을 쏟아라. 자녀들과 놀아주라. 시간을 내어 건강 검진을 받아라.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하라. 집안 청소를 할 시간, 쓰레기를 버릴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골프 공부터, 여러분에게 정말 중요한 것부터 신경을 써라. 나머지는 그저 모래에 불과할 뿐이다." (이 이야기도 그 정확한 출처는 불분명하다. 인터넷 곳곳에서 회자된다. 이 링크는 그 중 하나).


어디에서 들어본 듯한 이야기였지만 유치원에서 노는 아이를 바라보며 듣는 느낌은 사뭇 달랐다. 한층 더 진정성 있게 들렸다. 그리고 나를 새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땠는가? 혹시 모래를 채우는 데만 급급하진 않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