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현기자의 클래식 산책 | NEWS+ 1997년 8월28일치
세상의 모든 아침. (Tous les matins du monde, 1991)
92년 개봉되면서 유럽은 물론 전세계에 때아닌 바로크음악 열풍을 몰고 왔던 바로 그 영화(감독 알랭 코르노).
호르디 사발(Jordi Savall, 56)을 얘기하자면 어쩔 수 없이 이 영화를 끌어 와야 한다. 그만큼 영화와 영화음악이 유명했기 때문이지만, 바꿔 말하면 사발의 대중적 인지도가 그만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를 본(혹은 들은) 사람은 알 것이다. 비올라 다 감바의 은자(隱者) 생트 콜롱브가, 또 그의 제자 마랭 마레가 얼마나 기막히게 「베이스 비올」을 연주하는지 말이다.
그 중에서도 콜롱브가 죽은 아내를 그리며 연주하는 「눈물」(Les Pleurs)과 마레가 들려주는 「생트 콜롱브의 무덤」은 압권인데, 속삭이듯 흐느끼듯 이어지는 감바의 독특한 울림이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다.
그러한 감동의 명연 뒤에 사발이 있었다.
먼저 비올라 다 감바부터.
대체로 여섯 개의 현을 가진 이 악기는 첼로와 비슷한데, 음역에 따라 알토 테너 베이스 등으로 나뉜다. 흔히 「비올」이라 부르며, 16, 17세 기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비올에 대해 사발은 이렇게 말한다.
『비올의 현(鉉)은 첼로의 그것보다 덜 팽팽하며, 훨씬 더 유연하다. 첼로로는 노래할 수 있을 뿐이지만 비올로는 노래하 고, 대화하며, 울음을 울 수도 있다. 사람 목소리의 모든 기본 표현들이 비올 안에 있는 것이다』
당대 음악 재현 귀재…정격연주계 정상급 지휘자 영예
사실 사발을 무명으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도리어 문제를 삼아야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영미 음악계 편식증인지도 모른다.
사발은 유럽, 특히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비올의 신(神)」으로까지 추앙받는 인물이다. 거의 사멸 위기에 놓였던 비올을 복권시켰을 뿐 아니 라 중세로부터 바로크, 르네상스시대의 숨겨진 명곡들에 밝은 빛을 선사한 그의 공적을 생각하면 그리 지나친 대접도 아니다.
그는 이미 100개 이상의 음반을 남겼으며 프랑스 음반협회 그랑프리(89년), 샤를 크로 아카데미 그랑프리(90), 디아파종상 등을 수상, 그 품질도 충분히 보증받았다. 88년에는 프랑스 문화부장관으로부터 문예훈장을 받기도 했다.
사발은 천생 음악인이다.
1941년 스페인 이괄라다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여섯살 때 학교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다(47~55년).
18세 때 바르셀로나 음악학교에 입학해 65년까지 첼로를 배웠고, 그 직후부터 고음악을 연구하기 시작 했다.
68~70년 스위스의 「스콜라 칸토룸 바실리엔시스」에서 3년 동안 고음악을 단련한 뒤 본격적인 「수행」을 시작, 74년 「헤스페리온Ⅹ Ⅹ」를 결성했다.
중세음악을 전문으로 연주하는 이 앙상블에는 그의 아내이자 소프라노인 몽세라 피게라스를 비롯해 여러 국적의 음악가 들이 참여했다. 그는 새로운 스타일의 해석과 놀라운 음악적 생동감, 당대 음악(혹은 음향)의 충실한 재현 등으로 존 엘리어트 가디너,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로저 노링턴 등 영국 일색인 정격 연주계에 그만의 자리를 마련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800년 이전의 성악만을 연주할 목적으로 「라 카펠라 레알 드 카탈루냐」를 만들었고, 89년에는 마침내 바로크- 고전 오케스트라 「르 콩세르 드 나시옹」(이하 LCN)을 창설했다.
당대의 음악을 충실하게 재현하기 위해 몬테베르디합창단, 잉글리시 바로크솔로이스츠, 혁명과 낭만의 오케스트라 등을 만든 가디너와 비슷한 행보였다.
LCN은 빠른 속도로 그 명성을 높여 갔고, 사발은 「세계 최고의 비올라 다 감바 주자」라는 꼬리표 외에 「정격 연주계의 정상급 지휘자」라는 또다른 영예를 얻게 됐다.
그러나 존 다우랜드의 「7개의 눈물」, 프랑수아 쿠프랭의 「비올 작품집」 등 그의 비올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음 반은 국내에도 여럿 나온 데 견주어(모두 오비디스 레이블로 출간), 지휘자로서의 그의 역량을 엿볼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따라서 최근 선보인 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 「영웅」은 오랫동안 갈망해온 단비처럼 여겨진다. 심층적인 연구 끝에 내놓은 그의 베토벤은 단호하고도 강렬한 음색과 매우 빠른 템포로 혁명성을 강조한다.
가디너나 노링턴, 브뤼헨의 그것과 비교해 듣는다면 더욱 흥미로울 음반이다. 사발의 다음 베토벤 녹음이 기대된다. 김 상 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