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시작. 와와-수세인트마리 구간은 슈피리어 호의 영향으로 겨울철 도로 사정이 특히 불규칙하다.
그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다. 17번 고속도로의 와와-수세인트 마리(수) 구간에 대한 통행이 봉쇄되었다는 뉴스를 이따금씩 들을 때도, 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그런가 제대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었다.
금요일 낮 12시부터 밤 10시까지 와와로부터 토론토로 직접 운전해 내려오는 동안, 북부 온타리오에서의 겨울 운전이 어떤 것인지 생생하게 체험했다. 그러나 이 체험은 “좋은 경험 했다”라는 차원이 아니라 “죽다 살았다. 앞으로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라는, 실로 모골이 송연한 차원이었다.
와와로부터 수에 이르는 구간은 오대호 중에서도 가장 깊고 넓고 사나운 슈피리어 호의 기상 영향을 곧바로 반영하기 때문에 특히 예측하기 어렵고 위험하다. 금요일 오후 그 구간에는 ‘눈 돌풍(snow squall)’ 경보가 발령되었다. 동남 아시아에서 흔히 보는 그 ‘스콜’에서 비를 눈으로 바꾸면 쉽게 상상이 될 것이다.
약 4,50m 전방의 트레일러 트럭. 나중에는 저 트럭의 브레이크등만 겨우 보였다 말았다 했다.
눈의 미세한 가루들이, 슈피리어 호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어지러이 휘날리며 난무하는 연막을 친다. 차선은 이미 눈으로 뒤덮여 사라진 지 오래다. 앞 차의 눈 자국과 도로 양 옆으로 설치된 가드레일로 이 길이 맞는구나 예상하며 슬슬 진행할 수밖에 없다. 눈의 연막 탓에 도로가 순간 사라졌다 나타났다 한다. 도로가 눈에서 사라지는 것은 불과 몇 초지만 그 때마다 가슴이 덜컹덜컹 한다. 여기에 대형 트레일러가 가세하면 그 연막의 두께와 기세는 두 배, 혹은 그 이상으로 증폭된다.
트럭이 휙 지나치면 그 기세에 짙은 눈의 연막이 차를 덮치고, 순간 길도 사라진다. 그 순간 방향 감각도 마비되고, 내가 제대로 가는건가 불현듯 두려움에 빠진다. 앞서가는 트럭을 따라갈 때도 마찬가지다. 트럭을 추월하는 것은 언감 생심, 50~100 미터 거리를 두며 따라가도 트럭이 일으키는 눈보라의 커튼에 곤욕을 치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짙디 짙은 안갯속을 가는 것 같다. 눈의 안개다. 여기에는 여느 안개의 신비감이나 낭만이 없다. 두려움뿐이다.
슈피리어 호수에서 바람과 함께 날리는 눈이 길을 연막처럼 가렸다. 이 때만 해도, 희미하게나마 가운데 차선이 보이곤 했는데, 곧 그마저 사라졌다. 어쩌다 마주 오는 차를 만나면 그 불빛으로 가늠해 적당히 비켜서 진행했다.
이보다 더 나쁠 수 있을까.
충분히 그럴 수 있음을, 상습 폭설 구간인 배츠와나 베이(Batchewana Bay)에서 호되게 경험했다. 폭설과 바람이 엮는 안개의 두께가 상상을 넘어섰다. 말 그대로 ‘한 치 앞’이 보이지를 않았다. 앞유리에 머리가 거의 닿을 만큼 몸을 운전대 앞으로 쑥 내밀어 보아도 길이 분간되지 않았다. 양옆 가드레일조차 보일 때보다 안 보일 때가 더 많았다. 바로 앞에 트럭이 가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조차 보이지 않았다. 후미등이 눈으로 뒤덮여 그조차 분간되지 않았다. ‘아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막막함과 두려움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시야가 좀 트이기를 기다려볼까 하는 생각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일단 세우고 나면 견인되지 않는 한 그 오르막길을 스스로 오르는 것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휴게소가 어디쯤인지 감도 오지 않았고, 설령 있다고 해도 대부분 겨우내 폐업이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길 아닌 데로 빠져 어디로 쑤셔박거나 무엇을 들이박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그저 계속 앞으로 나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가능한 한 도로 중간으로 달리는 게 가장 안전한 주행법이었다. 마주 오는 차들이 거의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배츠와나 베이를 막 통과하면서, 왜 마주 오는 차가 없었는지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수로부터 와와로 가는 17번 고속도로가 차단된 것이었다. 경찰과 경찰차가 마주오는 길을 막고 있었다. 번쩍번쩍 돌아가는 경찰차의 빨간 경광등 너머로, 아득한 거리로 빼곡히 늘어선 수십 대의 차들이 보였다.
수세인트마리 인근으로 진입하자마자 거짓말처럼 시야가 탁 트였다. 꾹 참았던 숨을 파~! 하고 터뜨릴 때와 같은 시원함이 밀려왔다.
토론토에 닿을 때까지도 17번 도로는 계속 차단되고 있었다. 토론토에 사는 이들은 그 소식을 듣고 어떤 상상을 할까?
배리로 막 들어서, 토론토로 이어지는 400번 고속도로를 타면서부터는 또다른 세상이었다. 대체 폭설 퍼붓던 북쪽의 도로들이 과연 사실이었는지 스스로 의심스러울 만큼 깨끗했다. 차도에 눈이라고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아마 밤이었던 탓도 있겠지).
마치, 둘, 혹은 셋의 전혀 다른 차원을, 혹은 평행 우주를 통과해 온 듯한 기분이었다. (*)
수세인트마리를 막 벗어나면서 왼쪽으로 찬란한 석양이 보였다. 잠시 차를 세웠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고맙고 또 고맙다 혼다 시빅! 눈 폭풍을 잘도 뚫고 왔구나...차가 한없이 고마웠다. 차 뒤에 들러붙은 눈들이 그간의 행적을 잘 보여준다. 바닥은 완전히 빙판이다. 그래도 앞만 제대로 보이면 된다. 이제 집까지 6시간만 더 달리면 된다!
길 위의 풍경 | 2005년 1월 18일 오전 10:11
내려갈 때와 달리 날씨가 좋아 큰 어려움 없이 올라왔다. 시계만 좋으면, 심지어 길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어도 운전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SURVIVE WINTER DRIVING
TAKE EXTRA CARE
그런 사인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피곤하다.
아무리 길이 좋아도, 또 막히는 곳 없이 잘 와도, 9시간 이상은 잡아먹는 여행. 정말. 멀다. ... 아래 사진은 올라오는 틈틈이 찍은 것들. 멀고 고단하고 피곤해도,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겨울 풍경의 감동은 여전했다.
눈으로 꽉꽉 다져진 길. 이런 직선 주로는 급브레이크만 밟지 않으면 별로 위험하지 않다. 게다가 교통량도 많지 않았다.
슈피리어 호수 부근의 지형은 이와 비슷한 언덕을 많이 가지고 있다. 내리막길에서 조망하는 호수의 풍경이 일품이었다.
슈피리어 호수 위의 자그마한 돌섬. 거기에 저처럼 블랙스프루스 (흑가문비나무)가 서서 캐나다판 '세한도'를 연출했다.
눈을 인 가문비나무들 사이로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큰 키를 자랑하고 있다.
여정: 토론토 대 와와 | 2005년 2월 15일 오후 12:01
새벽 4시30분에 출발, 오후 1시40분 도착. 평소보다 한 시간쯤 더 걸렸다. 오면서 웬만한 겨울 날씨는 다 겪었다. 빙우, 우박, 폭설, 눈보라....
와와로 가는 길. 이 날은 불순한 일기로 더욱 애를 먹었다. 특히 눈비가 섞여 내리는 바람에 제대로 앞을 볼 수가 없어서 진땀을 뺐다.
평소 겨울 날씨가 예측불허이기로 악명 높은 패리사운드는 이번에도 최악의 운전 조건을 제공했다. 빙우 세례. 앞 유리로 퍼붓는 빙우는 그냥 와이퍼만으로는 닦이지 않았다. 워셔액(Washer fluid)와 함께 열심히 닦아대야만 유리창에 닿는 즉시 얼어버리는 그 빙우의 장막을 걷을 수 있었다.
어느 시점에서는 채 20km도 가기 전에 하나 남은 워셔액 한 통을 다 써버리는 통에, 꼼짝없이 날이 밝을 때까지 길가에서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 싶은 순간도 있었다. 다행히 빙우의 기세가 수그러든 데다 창쪽으로 열풍을 잔뜩 틀자 워셔액 없이도 그럭저럭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되어 다음 주유소까지 무사히 다다를 수 있었다 (그 주유소에서 워셔액 세 통을 샀는데, 무려 15달러였다. 더 기막힌 것은, 그 주유소를 지나자마자 일기가 바뀌어 사실상 워셔액을 쓸 일이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위 사진과는 전혀 대조적인 토론토의 한 풍경.
허무개그, 황당 개그가 한국에서 유행한 적이 있다(지금도 그런지는 알지 못한다). 가령 아파트가 정전이 되어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게 된 사람이 맨 꼭대기층 자기 집까지 겨우겨우 올라갔는데 열쇠를 아래 차에 두고 왔다거나, 다시 내려가 열쇠를 챙겨 올라와 보니 다른 동이었다든가 하는 식 말이다. 또는 몇날며칠을 벼르고 별러 물건을 사겠다고, 혹은 머리를 깎겠다고 가게에 (이발소에) 갔는데 '금일 휴업'이라는 식...
내가 꼭 그런 꼴을 당했다. 평소 출발시간보다 4시간이나 일찍 일어나 서둘러 와와로 올라온 것은, 오늘 오후로 예정된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 회의의 핵심 내용을 내가 취합하고 정리하는 일을 맡았었기 때문에 어쨌든 참석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죽어라 올라와 보니, 회의가 취소되었단다.
뭐 그렇다고 그 서두른 여정에 큰 불만은 없다. 결과론이지만 그렇게 서두른 덕택에, 일기가 더 나빠지기 전에, 눈이 더 쌓이고, 도로가 더 미끄러지기 전에 와와까지 무사히 다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평소처럼 아침 8시30분쯤 출발했다면, 아마도 더 힘든 운전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긴 운전을 마친 뒤에는, 늘 꿈꾼다. 두어 시간만 덜 걸리는 곳으로 갔으면... 그러나 올 겨울까지는 어쨌든 참고 견뎌야 할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