氣 철철 웬만한 독주자 압도 - 궁합맞는 파트너 만날땐 ‘환상의 선율’ 선사
96년 7월10일 예술의전당 음악당. 청중은 열광했다.
바이올리니스트 막심 벤게로프는 「21세기 음악계의 선두주자」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그 때, 적지 않은 청중은 또 한사람의 비범한 재능을 찾아냈다.
이타마르 골란(Itamar Golan·27). 벤게로프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연주회에 박진감을 더해준 피아노 반주자였다. 연주회가 끝났을 때, 그의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이어졌다. 퍽 낯선 풍경이었다.
그로부터 한달 뒤인 8월31일, 첼리스트 매트 하이모비츠의 연주회에서 청중들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보글보글 볶은 머리를 휘날리며 열정적으로 연주하던 반주자 골란이었다. 문제는 하이모비츠였다. 그는 벤게로프가 아니었다.
둘의 힘 관계는 팽팽한 긴장감과 아름다운 화음을 이룩하지 못했다. 오히려 반주자가 튄 주객전도의 연주회가 되고 말았다. 연주회가 끝난 뒤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골란의 사인을 기다렸다.
주연보다 더 인기있는 조연. 독주자보다 더 튀는 반주자. 골란을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그는 분명히 색다른 반주자다. 그는 「고수(高手)」다. 어쭙잖은 상대는 그와의 「기」(氣) 싸움을 견디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좋은 반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골란 자신은 『단 한 번도 독주자와 경쟁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강조한다. 『나는 언제나 제2인자(Second)로서 연주한다. 나는 그것이 즐겁다. 독주자로 나설 생각은 전혀 없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당신의 반주가 때때로 독주자의 그것을 넘어선다고 말한다. 당신의 개성이 너무 강한 것 아닌가?
『전혀. 나는 무대 위에서는 오직 연주에 몰두할 뿐이다. 독주자와의 음악적 대화, 작곡가와의 정신적 교감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다른 모든 것은 잊어버린다』
“난 영원한 세컨드…독주자와의 교감에만 몰두”
골란의 빛나는 연주는 반주자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운다. 독주자가 빛이라면 반주자는 그늘이다. 그늘은 드러나지 않는다. 늘 조연에 머문다.
알랭 조미가 음악 감독을 맡았던 영화 「반주자」(L'accompagnatrice)에서 우리는 반주자의 고뇌, 그가 독주자에게 갖는 애증 따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골란은 다르다. 그는 2등의 자리, 독주자를 받쳐주는 자리에 더 애착을 보이는 듯하다.
3월1일과 7일, 골란은 한국의 청중에게 또 한번 음악의 참맛을 선사했다. 바이올린의 대가 정경화가 그의 상대였다. 슈만과 브람스, 그리고 바르톡을 통해 두 사람은 연주자가 도달할 수 있는 한 정점을 보여주었다.
많은 음악애호가들은 골란의 절묘한 반주가 정경화의 연주를 더욱 빛내주었다고 칭찬했다. 『골란은 천재다. 얼마나 센스있고 유연한지 모른다. 절로 신이 난다』 정경화도 골란 자랑에 침이 마를 지경이었다.
무대를 벗어난 골란은 자유분방하고 예술 탐닉적인 독신남성이다. 『나는 어느 한곳에 집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대 위에서 연주할 때가 유일한 예외』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피아노 반주자이면서 파리콘서바토리의 교수이고 또 시인이다. 60~70년대의 유럽 영화에 열광하며, 지독한 재즈광이어서 일주일에 두세번씩 뉴욕을 찾을 때도 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 바라는 것만을 하고 싶다』고 그는 말한다. 반주자 노릇도 그가 「하고 싶은 것」일 따름이다. 슐로모 민츠, 매트 하이모비츠와 함께하는 트리오 활동도 마찬가지.
가곡을 반주할 계획은 없는가.
『오는 10월 바바라 헨드릭스의 가곡을 반주할 계획이다』
그로서는 처음 해보는 가곡 반주다. 『가곡을 반주하는 것과 다른 악기를 반주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두 분야에서 똑같이 성공을 거두기란 쉽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올해 그의 계획에는 베토벤의 피아노트리오 녹음도 들어있다. 양수겸장인 셈이다. 그가 두 분야에서 모두 성공할 수 있을까?
그의 표정은 여전히 태평스럽고 안온하다. (그의 반주솜씨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벤게로프와 함께 녹음한 베토벤 바이올린소나타 「봄」과 「비르투오소 벤게로프」(이상 텔덱)를 권한다) <김 상 현 기자>